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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Apr 02. 2023

모두의 전염병, 모두를 아우르는 민주주의

2020. 10. 1 

친애하는 A,

잘 지내고 있니? 

지난 1월 뚜르꾸에 가서 논문 공개심사(디펜스)를 하고 너를 비롯한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새벽까지 수다를 안주삼아 맥주를 기울이던 시간들이 생생하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젠 여기서 거길 가려면 열몇 시간의 지상 이동과 아홉 시간의 비행 말고도 한국에 돌아와 14일 동안 자가격리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그곳을 자꾸만 아득하게 만들어. 내 마음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여기와 거기를 왔다 갔다 하는데 말이지. 


디펜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인천공항에서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했지. 그리고 2월 중순에 반 아이들과 종업식을 하자마자 이곳 대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무서운 속도로 쏟아져 나왔어. 그때 네가 페이스북 메신저로 안부를 물어와 서로 집에 앉아 영상통화를 했던 거 생각나니? BTS의 인기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간 바이러스도, 집에 콕 박혀 있던 나의 안부를 물어준 너의 페이스북 영상통화도 모두 세계화의 산물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하다. 살아있으니 걱정 말라고 네게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며칠마다 한 번씩 쓰레기를 버릴 때나 겨우 외출을 하고 온라인으로만 장을 볼 정도로 그때 나는 낯선 바이러스에 잔뜩 겁먹어 있었어. 집에서 10분만 걸어가면 폭발적인 감염원이 되었던 그 교회가 있었고, 대로변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심장을 파고들 듯 울려대는 엠뷸런스 소리와 공습경보처럼 오후 4시만 되면 정적이 감도는 거리를 깨우는 코로나 경고방송을 꼼짝없이 들어야 했거든. 지난 몇 달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게 되었어. 내 몸만 한 배낭을 들춰 메고 인도와 티벳을 여행하고 근 십 년간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을 떠나 유학생활도 감행했지만 바이러스 앞에서 예민하고 불안해지는 나를 발견했지. 올여름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어. 여전히 겁이 많고 조심스럽지만 제한적이나마 바깥세상과 만나려 노력하고 있어. 학교에서 아이들도 계속 가르치고 있고. 


지난 6개월은 주로 집에서 먹고 생활하는 단순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나와 사람들의 일상이 근본적으로 변한 시기였어. 사람들은 여전히 관성의 법칙에 따라 예전처럼 모여서 먹고 마시고 얘기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예전의 일상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갈 날을 고대하지. 하지만 이젠 완전한 BC (Before Corona)의 시대로는 돌아갈 수 없는 AC(After Corona)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아. 


내가 페이스북 쪽지에서 전한 대로 이곳에선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자체보다 확진자들의 동선이 공개되면서 생긴 사회적 여파에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고,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지. 확진자가 발생하면 지자체에서 역학조사를 한 다음 그 사람이 언제 어디를 다녀갔는지 공개한단다. 확진자의 휴대폰 위치 정보를 확인하고,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해서 동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진단 검사를 받을 것을 권하는 안내 문자를 보내지. 물론 확진자의 이름이나 주소 같은 개인정보는 공개되지 않지만 초창기에는 인터넷에서 확진자의 개인신상정보를 캐내려는 사람들 때문에 인권침해의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어. 그리고 혼외 연애 같이 비밀스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동선이 공개될까 봐 숙박업소 이용을 자제하거나 신용카드 결제를 꺼린다는 얘기도 들렸고. 


혐오와 기피도 코로나 초창기 한국사회의 모습을 대변한 키워드 중 하나였지. 대구의 특정종교단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바이러스가 번지던 2,3월에는 낯선 감염병에 대한 공포만큼이나 종교집단에 대한 혐오가 사회에 만연했어. 코로나 의료진들의 자녀가 학교에 등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 5월 초 연휴 기간에는 서울 이태원의 게이 클럽을 중심으로 감염병이 확산되면서 성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가 터져 나오기도 했어. 8월에는 보수 기독교 단체가 주선하고 반정부-보수 성향의 6,70대 시민들이 참여한 집회를 중심으로 감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종교집단에 대한 혐오가 다시 불거지기도 했지. 그때 우린 바이러스보다는 인간을 무서워하고 미워했을지도 몰라. 특정 지역, 특정 집단과 접촉을 끊어내면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 


강력한 거리두기가 시작된 2월 말부터 나는 창밖으로 매일 바깥을 내다보면서 이웃들이 무사한지 살펴보곤 했어. 인적이 끊긴 거리에 개미같이 작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가는 걸 확인하며 안도하고, 은행과 약국이 아침에 문을 여는 걸 보며 모든 것이 문을 닫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어. 교사가 되고 난 이후 처음으로 봄이 되면 꽃이 핀다는 걸 관념이 아닌 실증으로 깨달을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 주는 마트의 배송 기사님들과 택배 기사님들에게 쪽지를 써서 마스크와 함께 수줍게 문 앞에 붙여 놓기도 했지. 할 수 있는 게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고 기사님들에게 마스크를 건네는 것 밖에 없었던 나는 카뮈의 ‘페스트’를 읽기 시작했어. 어쩌다 외출하는 날이면 도로에서 어김없이 구급차를 볼 수 있었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두류야구장은 빈 병상이 생기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구와 경북 지역의 환자들을 병원으로 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구급차들이 집결하는 장소였거든.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방역복과 마스크로 온몸을 감싼 채 땀을 쏟아내고 있을 구급대원들에게 소심하게 손을 흔들고 지나갔어. 


5월 어느 날, 동네 뒷골목을 한참 걸어 다녔어. 교사가 되고 나서 첫 발령을 받은 학교와 그다음에 옮겨 간 학교 모두 교사들이 근무하기를 꺼리는 낮은 급지의 학교였고, 신규교사 시절부터 이 동네에서 원룸을 몇 차례 옮겨 다니며 살았지. 한 때 대구의 터줏대감이었을 이 동네는 크고 밝은 동네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부자와 중산층이 수성구와 신도심인 달서구로 빠져나가면서 쇠락한 지역이 되었지. 부자들의 고급주택이 있었을 앞산 중턱 골목엔 원룸 빌라 건물이 들어차 있었어. 원룸 건물로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고급주택들은 이 동네의 화려한 옛 명성을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이곳 주민들이 사는 집이 아니라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집들이었고 손님들로 다시 북적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 고급스러운 외양의 카페와 레스토랑 거리만 있는 건 아니야. 이 동네의 풍경은 일요일이면 신자들, 특히 흰색 옷을 맞춰 입은 앳된 청년들이 예배를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교회 건물, 철학관 간판을 단 점집, 그리고 원룸 주택가 옆에 붙어 있는 절이 기묘한 동거를 이루고 있는 모습으로 완성되기도 해. 이렇게 신이 많은 동네에 바이러스가 제일 먼저 찾아들었어. 폐지를 줍는 어르신도, 고독사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도 많은 이 동네가 코로나 초창기에 전국적으로 기피의 대상이 된 대구 안에서도 다시 기피의 대상이 되는 고초를 겪었단다. 


‘감염병이 불러온 공포와 혐오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공권력은 개인의 인권을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팬데믹 앞에서 인류는 어떻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코로나 시대 우리 삶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실이 된 것 같아. 지난 반년은 고통스러웠고 대단히 정적이었지만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겨울과 봄에 이어진 1, 2차 대유행의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무지와 공포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지만 이제 어느 집단이든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감염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팬데믹(pandemic)이야말로 인류가 그동안 서로를 구분 짓고 차별해 왔던 종교, 지역, 국경, 인종, 성정체성, 계층을 훌쩍 뛰어넘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종(species)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었어. 전염병만큼 우리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을 거야. 가족, 이웃, 친구, 동료, 주인과 손님, 모임의 회원, 관광객과 현지인 중 어떤 관계에도 얽혀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염병의 시대에 핀란드든 한국이든 소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타인과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지.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집밖으로 어서 나오라고 부르는 것만 같은 오늘은 한국에서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추석이야. 정부에서 명절 기간 동안 대이동이 아닌 대멈춤을 호소하고 있구나. 여기에 호응해서 자발적으로 여행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코로나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연휴 기간 동안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도 시행착오와 사회적 논의를 거듭하며 개인의 자유와 주권자들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더 큰 자유 사이에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을 처절하게 반복하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바이러스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일회용품 사용에 대해서도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어.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 2019년 코로나19와 같이 동물을 매개로 하는 감염병의 발현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이것이 기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2020년 우리 일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코로나는 일회용 마스크와 승용차로 피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류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음처럼 들려. 일회용 마스크를 쉽게 버리고, 간편식이나 음식 포장 또는 배달을 이용하고, 택배로 물건을 받고, 포장용 상자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배출하고, 대중교통 대신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함을 넘어서 감염예방을 위해 바람직하게까지 여겨지는 이 시국의 생존법이 계속 장려되어야 하는 것일까. 코로나는 우리에게 감염병 속에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민주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또 하나의 숙제를 던져 주고 있네. 


A, 2019년 가을에 핀란드에서 돌아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한국사회는 코로나 시국에도 여전히 맹렬하게 내달리는 폭주기관차 같아. 학교 현장은 원격 수업과 대면 등교수업 그 사이 어딘가에서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지침에 적응하고 수업에 더해 방역까지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어. 다른 분야의 직장인들도 재택근무를 하던 회사로 출근을 하던 업무량은 그대로인 것 같아. 아니, 택배노동을 하시는 분들은 배송 업무량이 폭주해서 과로사할 지경이지.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던져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건은 경쟁과 성과의 법칙에 따라 앞으로만 나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유지해 온 삶의 방식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논의하고,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 민주주의는 시간과 기다림을 먹고 자라니까. 


특히 학교의 민주주의 교육에는 귀 기울여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느림의 미학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 원격수업을 멋들어지게 잘하기 위한 기술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기후 위기라는 어려운 과제와 맞닥뜨린 우리와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겐 숙고하고, 토론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인간 세상과 지구 생태계에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교육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연휴엔 가족을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미리 비상(?) 식량과 미역국거리를 주문해서 냉장고에 넣어뒀지. 이 편지를 쓰고 나서 바로 끓여야겠어. 약간의 기름 냄새만으로도 명절 분위기를 돋울 수 있는 법이니까. 지난 2월이 또 생각나네. 그땐 나도 ‘랑베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언제든 대구를 떠날 수 있게 짐가방을 꾸려 놓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 이 도시와 대한민국의 지난 6개월을 너에게 전하면서 이제 후방의 사람들에겐 숫자와 그래프로 추상화된 재앙이 되어버린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리외’를 생각한다. 또, 확진자가 집에서 방치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대구의 환자들을 이송하기 위해 달려왔던, 자신들의 병상을 내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던 ‘타루’를 기억한다. 지난 몇 년간 중동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핀란드까지 도착한 난민들을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않던 ‘그랑’을 떠올려 본다.* 모두의 재난 앞에서 자신의 일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지역이나 국적, 종교로 딱지를 붙여 배제하지 않고 환대한 사람들을 기억한다.


페이스북을 열어 네 모습을 본다. 파란색 덴탈 마스크를 쓰고 있는 네 얼굴이 너무 낯설어. 여전히 두 눈은 웃고 있구나. 맵시 있게 다듬은 콧수염은 그대로 있겠지? 재치 있는 말과 성대모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던 네 입술을 마스크 위에 살짝 그려본다. 부디 건강 잘 챙기렴. 하멘린나에 계신 부모님도 건강하시길 기원할게. 


대구에서,

J



* 알베르 카뮈. (1947) 2011.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 커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eanet/50270164457

              (사진: Jeon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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