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니 좋았다
우리 성당 주임 신부님은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 신부님이셨는데 8월 말에 정년을 맞이하셨다. 흔히들 '퇴임식'이라고 생각하는 행사가 성당에서 꽤 오래전부터 예고되어서 나는 그날만큼은 주일 교중미사를 참석하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말해두었다. 보통 토요일 오후 4시에 있는 어린이미사를 참석하기 때문에, 주일미사는 아이들에게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람도 많을 텐데 굳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을 '성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행사는 아닐 것이다'라는 말로 설득했고 아이들도 원해서 결국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 신부님의 마지막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신부님
성당에는 보통 주임 신부님과 부주임 신부님이 계시고, 수녀님도 두 분 이상이 계시는 듯하다. 우리 성당은 특별히 유치원이 있어서 유치원 원장이신 원장 수녀님까지 총 세 분이 계신다. 나는 성당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일 학교를 등록한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이었기 때문에 주임 신부님보다 부주임 신부님을 먼저 뵈었다. 중년의 부주임 신부님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어린이 미사에서 뵈었기 때문에 친근한 이미지였는데, 부활미사에서 처음 뵌 주임 신부님은 왠지 좀 엄격하고 무서워 보였다.
여름에 우리 둘째가 참가했던 '여름 성경 교실'에 잠시 아이를 데려다주러 갔을 때 성당 앞마당에 계시던 반바지 차림의 할아버지가 다시 보니 주임신부님이셔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복사를 자주 서는 고학년 아이들은 할아버지 신부님의 주변에 모여들어서 신부님과 농담을 주고받고 무척 따르는 모습이었다. 교중미사는 중요한 의식이니만큼 진지하게 본업에 충실하셨던 것이고, 사석에서는 아이들에게 친근한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대하시는 것을 보고 괜한 오해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퇴임이 아니라 이임미사
오랫동안 성당에서 예고한 큰 행사인 만큼, 퇴임식날 성당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신자들로 가득 찼다. 나는 오전 9시에 먼저 예비신자교리를 듣고 본당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예비신자석'이라는 특별석에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자리가 부족해 평소에는 일반 신자가 잘 올라가지 않는 2층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본당이 2층이어서 엄밀히 말하면 3층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곳은 보통 성가대가 있는 곳이다.) 우리 성당의 신자 외에도 신부님의 손님들이 내빈석에 자리하고, 신부님의 지인이신 동기 및 후배 신부님들은 주임 신부님을 따라 중앙 통로로 입장해서 함께 무대에 오른 뒤 양옆에 학익진의 모습으로 자리 잡으셨다.
주임 신부님은 본인 나이가 이제 칠십이나 먹어서 본당의 주임 신부로서는 퇴임을 하게 되었으나, 신부라는 사람들은 사실상 퇴임이 없다고 하셨다.
신부가 뭐 하는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칠십 넘었다고
기도를 멈추느냐?
아닙니다.
사제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 날까지 - 어쩌면 가서도 - 계속 기도하기 때문에 퇴임(일을 그만둠)미사가 아니라 이임(다른 사람에게 넘겨줌)미사라고 한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부님들의 축사
우리 성당에서 작년까지 부주임 신부님을 하셨던 신부님께서는 예전에 보좌 신부였을 때부터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셨고, 함께 우리 성당에서 지내실 때에도 한참 어린 자신이 하는 일을 다 믿고 허락해 주셨다는 미담을 전했다. 주임 신부님과 신학대학교 동기간이라는 분은, 자기처럼 친구가 없는 사람은 이임식 때 별로 손님도 없는데 이 사람은 어딜 가나 '핵인싸'여서 사람들이 OO이 어디 갔느냐고 찾는다고 부러워하시며 격의 없는 사이임을 보여주셨다.
마치 외국 영화에서, 주인공의 지인들이 와인잔을 들고일어나 자기들이 이 사람과 어떤 사이이고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다는 말을 편안하게 들려주는 것처럼 모두들 따로 준비한 대본을 읽는 것도 아닌데 말씀을 재미있게 해 주셨다. 미사가 끝나고 만난 딸아이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우리 신부님만 말씀을 재밌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다들 말씀을 너무 잘하시더라.
대규모 성체 성사
미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성체 성사의 시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성체를 언제 다 주나? ‘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무대(?) 위에 계시던 손님 신부님들이 다 같이 성체를 향해 손을 뻗어 제병(祭餅, 라틴어: Hostia, 성찬례 때 나누어주는 빵)에 축성(祝聖, consecration)을 하셨다. 그러고 나서 몇 분은 빵을 나누어 들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시고, 1층에서도 구역별로 나누어서 여러 신부님들이 다 함께 성체를 나누어주셨다. 마치 지구의 용사 캡틴플래닛이 초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벅차올랐는데, 나는 예비신자여서 아직 성체를 모시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장면을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볼 수 있어서 그것 만으로도 축복이라 여겨졌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우리 성당에서 신부님이 정년을 맞아 이임미사를 하시는 행사가 처음이었다고도 하니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잔칫집에 어울리는 국수
공식적인 미사가 끝나고 마지막 순서로는 신부님의 어린 시절부터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청년기, 중장년기의 모습을 담은 영상 상영이 있었다. 흑백사진 속 소년이 자라 사제가 되고, 해외 유학 및 봉사 활동을 다니며 점차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고되었던 대로 미사 후에는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맛있는 잔치국수에 떡과 과일을 곁들인 그야말로 '잔칫집' 같은 음식이었다. 한 시간 가량 엄마와 떨어져 있던 아이들은 지하 소성전에서 국수를 맛있게 먹다가 뒤늦게 내려온 나를 반겼다. 아이들이 배부르다면서 남긴 떡과 과일을 그냥 버리는 것이 왠지 죄송스러워 나는 이미 꽉 찬 배를 두드리면서도 남김없이 먹고 정리했다. 비록 성체는 모시지 못했지만, 축복받은 오늘 같은 날 많은 신부님들이 "얍"하고 축하의 에너지를 모아주셨으니 이 잔치음식들도 모두 축성받은 성체나 다름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주임 신부님이 떠나신 자리에는 곧 새로운 주임 신부님이 부임받아 오셨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신부님이셔서 부주임 신부님보다도 두 살 어리다고 한다. 처음 주임을 맡게 된 곳이 예상보다 너무 큰 본당이라 얼떨떨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할까 생각도 많으시다는 솔직한 첫 인사에서 신부님의 많은 고민이 느껴졌다.
성당을 오래 다닌 아이들 친구 엄마는 꼭 우리 성당에 필요하신 분을 신부님으로 보내셨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전 신부님이 특유의 카리스마로 오래묵은 성당의 좋지 않은 관습을 없애고 신자들 사이의 문제를 중재했다면, 이번 신부님은 우리 성당에 청년 및 중년의 젊은 신자들이 눈에 띄지 않아서 그들의 참여를 독려하고자 오신 게 아닐까 하는 게 엄마들끼리의 짐작이다.
성당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지 궁금해지는 마음과 함께 새로 오신 신부님이 뭔가를 하려고 하시면 성심껏 도와드리고 싶은 건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생각이 아닐까? 나는 햇병아리 신자인지라 정확한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께 주워들은 풍월로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고, 조금씩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들로 미래의 변화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