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 주기
김세은
이른 아침이다.
식탁에 앉아 책을 펼치다 무심코 고개 들어 보니 평소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확 들어 온다.
아까워 버리지 못한 빈 플라스틱 그릇들, 켜켜이 쌓여 자기가 주인인양 베란다 싱크대 위에 버젓시 앉아 있다.
24시감자탕집, 중국집, 장수촌 누룽지탕, 가장맛있는 족발집, 항아리 보쌈집, 음식 담아온 그릇들이 단단하고 견고해 장아찌 담고 야채 박스로 사용해도
좋음직해서 버리지 못했다. 감자탕집 빨간 플라스틱 양동이는 반환하면 1000원씩 되돌려 준다. 어림잡아 20개 정도 겹쳐져 있다.
빨리 정리 해야 하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언짢고 신경이 쓰인다. 이렇게 아까워서야!
그 뿐인가?
상태는 좋은데 손길이 닿지 않는 빽빽히 걸려있는 옷들. 막상 결혼식이나 모임행사에 가려면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 갈까 말까 망설여 지기도 한다. 저렇게 많은데. 버릴 것도 없다.“언젠간 입겠지”,“살 빠지면 입을 수 있을 거야”, “비싼 돈 주고 샀는데” 하며 애써 외면하지만 안 입을게 뻔해 또 언제까지 방치하며 두고 볼 건가!
쓰임 없는 것들에 둘러 쌓여 갇힌 듯 답답하고 미세한 짜증도 생긴다.
‘
싱크대 속에서 잠자던 친구가 사준 그릇, 결혼 혼수로 장만한 그릇들 거기에 깃든 추억 속 시간만을 남긴 채 15년전에 이사할 때 웬만큼 다 버렸는데 빈 공간이 없다.
구 모델 되어 버린 전자제품, 핸드폰, 폐품이 된 채로 서랍 속에 오래 방치 되어 있다. 또 있다. 꽉 찬 냉동실 구입날짜가 언제인지 모르는 먹거리들.
위 나라에 출사표를 던진 제갈량처럼 버려야 할 것들과의 전쟁 어제를 시작으로 오늘, 내일도 아주 조금씩 비우고 놓아주고 평정하자.
버려야 하는 것이 어디 물건뿐이겠는가? 집착하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 놓는 일 많이 아쉽고 어려운 일이다.
30여년간 생활이 된 테니스! 치고 나면 무릎이 즉각 반응해 포기해야 만 했던 일, 28년간 다니던 직장 명예퇴직이란 명분 아래 사표 던져야 했던 일, 17년간 갇혀 있던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 날 때도.
내려 놓으면 세상 끝날 것처럼 우울하고 막막하고 삶의 축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을 겪었다.
비우면 새로운 무엇인가 채워진다고 하던가!
테니스 치던 자리에 또 다른 운동, 명예퇴직하고 빈자리 제2막을 열게 한 공인 중개사 타이틀, 사무실 벗어나며 자유로움과 신나고 재미있는 취미생활, 가슴 뛰게 한 글쓰기로 채워졌다.
지난날 돌이켜 보니 내려놓은 모든 것들이 죽을 만큼 힘듦과 심한 갈등이 있었음에도 다시 봄이 오듯 텅 빈 틈 사이로 즐거움과 충만함이 비집고 들어와 준다.
‘쥐고 있는 손을 펴면 무엇이든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고집스럽게 얽매는 채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비움이다’라는
문구를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제까지 집착하며 붙잡고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
‘버린다는 건 알맹이를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사람이건 물건이건 포기할 건 포기하자.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어떤 일이든 실수 없이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
나이 들어 자신감이 많이 사라졌다.
바꿀 수 없는 세상일에 열 올리며 이득 없이 감정 소모 하는 일.
있지도 오지도 않을 일을 사서 더한 상상력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일 등.
모두 인생 낭비인 것을. 과감히 놓아주자.
치열하게 살아 왔던 젊은 시절 갖지 못했던 자유로움 제법 나이 들어 찾아 낸다.
신바람 나는 취미생활, 가족과 함께 즐기는 운동, 가슴 뛰게 하는 독서와 글쓰기로 나의 삶을 채워가고 싶다.
손아귀에 꽉 잡아 놓아 주지 못한 감정들을 모래알 빠져 나가듯 조금씩
놓아가며, 진화하는 삶 속에 새로운 균형을 찾아 나선다.
202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