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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기-그리움 한가득

by 김세은



“오늘은 뭐 해 먹지?”


매일 저녁 밥 때가 되면 소리없이 읇조린다.


냉동실를 열고 ‘시래기’라고 붙인 그릇을 꺼내 물에 담가둔다.

얼마 전 초록 무를 사서 나박김치를 담았다. 푸성귀 같은 굵은 무청은 따로 삶아, 한 움큼씩 나눠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 시래기를 해동해 껍질을 살살 벗기고 된장과 갖은 양념에 조물조물 무친다.

그리고는 멸치, 쌀뜨물, 다시마 한 조각 넣고 졸인다. 잊지 않고, 그때의 기억과 함께.


시래기를 조리 할 때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한국화, 그 중에서도 채색화를 가르쳐 주셨던 이혜자 교수님.

강의가 끝나면 분당 미금역에서 중앙공원까지 손 잡고 탄천 길을 걷곤 했다.


그분은 욕도 찰지고 구성지게 잘 하셨고, 그날 수업에 관한 서로의 궁금증을

얘기 하기도 하고 가끔은 속삭이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기도 하셨다. 그렇게 걷던 그 길, 즐거웠던 그 시간들이 애잔하고 아련하게 떠오른다.


산책 후에는 자그마한 호프집에 들러 공짜 강냉이 안주에 500cc 생맥주 딱 두 잔을 시켜 마시곤 했다. 눈치 보며 한참 동안 나누던 그 소박한 즐거움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와! 점심 먹자” 고 하셔서 달려가 보았더니 손수 만든 시래기 반찬 하나가 푸짐하게 올려져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맛있는 시래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시래기는 쌀뜨물에 다시마 넣고 끓여야 더 맛있어”. 하며 미소 짓곤 하셨다.

화장기 없는 얼굴, 수수하고도 아름다운 서글서글한 모습

때로는 진지한 대화로 내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셨고, 그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처음 느끼게 해주신 분이다.


해마다 10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초대해 주시며

그림에 대해 낯설어하는 내게 조금은 친밀하게 다가오게 해 주셨다.


그러다 어느 날, 부고 문자가 도착했다.

코로나19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

장례식조차 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무력하고 덤덤했던 마음 한 켠이 이제야 저리도록 시리다.


거실 벽면에 걸린, 그분의 양귀비 그림이 말을 건넨다.

“나도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꽃잎이 손짓을 해온다.


이혜자 화가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팬데믹의 이름 아래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 분은 거의 양귀비 꽃을 주제로 많이 그리셨는데, 화려하고 단순한 꽃만이 아닌,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담아내며 세상과 소통하셨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어쩌면 하늘나라의 화실에서 여전히 붓을 들고 계실 것만 같다.


“김 싸 장!” 하고 부르시던 그 호탕한 목소리.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시래기를 끓이는 동안 그리움도 함께 온다.

식탁에 조용히 앉아, 시래기 반찬 한 가지와 밥을 먹으며 그때의 그 맛 인양

입안 가득 추억이 서린다.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만나야 할 사람.


덤덤하던 마음이 글을 쓰는 내내 눈가가 촉촉해옴은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일까!

글에 대한 감성에서 일까? 오늘도 그리움이 한 가득, 마음 한 켠 쓸쓸하다.


2024.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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