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 이후
2024년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 민주당 지지자인 나는 크게 만족할 만도 하지만 너무나 석연치 않다. 대구 경북은 그렇다 쳐도 내가 살고 있는 부산의 18개 지역구에서 고작 한 곳에서만 민주당 당선자가 배출되었다. 언론에서 주목했던 낙동강 벨트 지역에서도 민주당은 참패를 당했다. 부산 경남 지역 총선의 결과에는 막판 보수 표심의 결집이 가장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장 타당하게 다가온다. 1990년 김영삼의 3당 통합 이후, 수 십 년 간 잃어버렸던 부산의 야도(野都) 본성이 이제야 깨어나나 싶었는데 끝내 찻잔 속 태풍으로 끝이 났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1. PK TK 노인들
이른바 ‘나라를 팔아먹을 지경’이라도 그리 국힘당을 찍어주는 60, 70대 이상의 노인들의 결기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일단은 그들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교육과 청년기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에 의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본다. 온 나라가 병영 사회였던 60년대 및 70년대에는 군대에서 아랫사람을 강하게 통솔하는 군인 정신(?)은 국가와 학교 및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지배적 헤게모니였다.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채 항상 근엄한 손짓을 하는 대통령을 TV로 보는 청년들의 머릿속에는 ‘나라의 통수권자는 저렇게 엄한 아버지상을 해야 맞지’라는 사고방식이 굳어졌을 것이다. 바뀌지 않는 정권에 대항하는 야당 정치인 및 대학생들은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배은망덕한 자식과 동급이라 생각했고, TV뉴스를 통해 그들을 북한의 간첩이라고 발표하는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의 브리핑도 심심찮게 목격했다. 그러니 박정희에게 대항했던 김대중, 전두환에게 대항했던 노무현, 박근혜와 싸웠던 문재인은 그들에겐 빨갱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 누가 북한에 나라를 갖다 바쳤던가?)
그들 중 대다수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대통령은 다수 국민이 함께 한 촛불 혁명에 의해 파면되었다.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는 스펙트럼 폭은 넓기에 한 인간이 결정한 하나의 선택은 그를 이루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에 의해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선택이 설사 잘못된 것이었음이 판명 나더라도 자아를 이루는 스펙트럼 일부만 수정하면 사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박근혜를 선택했던 다수의 노인들 중에서 내면을 이루는 스펙트럼 따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사람들은 박근혜의 탄핵은 곧 자신을 부정당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아둔했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기본적인 ‘정치적 자존감’이 고취될 시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현대사를 짚고자 함이다.)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싶진 않았기에 22대 총선 직전 여론 조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선거 막판 국힘당의 “200석은 제발 막아주세요. 탄핵당할지 몰라요.”라는 읍소에 그들은 역결집 했고 이는 부울경의 총선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그 외 관성적 2찍들.
우리나라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한 개인의 사고(思考)와 욕망은 새롭게 조작되기 쉽다. 대중매체를 통해 들은 것을 자기 생각처럼 말하고, 백화점에서 유행하는 상품을 내가 원하는 있는 상품이라 착각한다. 우리는 자본가의 노예이면서도 주인처럼 말하려 하고 자본가들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가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정당에 표를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매체에 길들여진 우리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더 피폐한 삶으로 내모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 정당이 내 삶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지배자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더 크게 일조할 것이다.
재벌공화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누구든 부자 정당을 찍는 관성적 노예가 되기 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정당이 우리나라 국회 역사에서 다수당이 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작고 2024년 총선 결과와 같은 압도적 승리는 앞으로 다시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바뀌기 어렵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한민국에서 선거를 치르고 나면 매번 깨닫는 진리이다. 이 글도 그래서 사실 회의적이다. 나와 반대 생각을 가진 이가 이 글을 구경할 리도 없으려니와 본다 한들 얼마나 변하랴. 그냥 너무 답답한 마음에 담벼락 낙서의 심정으로 그적거리기라도 할 수 밖엔. 그나마 머리가 완전히 굳어버리기 전의 시기인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민주시민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하게 하는 교육 활동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될 터인데 대학입시에만 함몰되어 있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에 일반 시민은 물론, 과학자들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수세기가 더 지나면서 천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서양 과학계에 지동설이 도입될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바뀔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