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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Jul 02. 2024

나를 비우기

약속에 나가지 않은 경험

   1년 전, 저녁 시간이었다. 와이프는 자기 이모와 한참 통화를 하더니 내게 대뜸 말했다.

 “이모가 고윤이 남자 좀 소개해 달라 하는데?”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태 사윗감을 데려오지 않던 딸을 답답하게 생각했던 와이프의 이모는 와이프에게 전화로 한참을 하소연하면서 내게 괜찮은 남자 하나 물색할 것을 부탁해 왔다.

  머릿속에서 젊은 체육 선생님 한 명이 떠올렸다. 곧바로 와이프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소개해 줄 남자에 대한 인상착의와 성격을 설명하였다. 학교 구성원들 대부분이 괜찮게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소개해 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립 서비스도 함께 하였다.

  내 설명을 듣던 와이프 이모님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질문하였다.

 “한서방. 그런데 그 사람 정교사인가?”

  난 와이프 이모님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였고 다른 얘기를 덧붙이며 답하였다.

 “이모님. 지금은 기간제 교사인데요. 앞으로 학교에서 체육 정교사 공고를 내면 합격할 확률이 매우 높은 분입니다. 그리고 설사 우리 학교가 아니라도 워낙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니 어느 학교에서든 근무하는데 큰 지장 없을 것이고요.”

 “그래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믿을 만한 사람이겠지.”

  이모님이 안심하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은 뒤, 와이프와 나는 웃으며 농담을 나눴다.

 “야. 이러다 그 체육선생이랑 나랑 처남 매제 되는 거 아닌지 몰라. 하하.”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이프 이모와 내가 전화 통화를 한 다음날, 와이프 이종사촌 여동생과 그 체육 선생은 문자메시지로 서로 대화를 나눴고 첫 만남 시간과 장소도 정하였다. 그런데 약속한 당일, 만나기 한 시간 전에 여자 쪽에서 나가지 못할 일이 생겼다는 문자를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남기며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였다.(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소개팅을 주선한 적 많았지만 내가 연결시켜 준 남녀가 그런 식으로 만남이 파투 난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직장인 체육 선생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와이프의 이모나 이종 사촌은 와이프와 내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주선자인 나를 얼마나 무시했길래 그리 일방적으로 약속을 뒤집고도 아무 말 없는 걸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남에게 그런 욕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 역시 와이프 이종사촌과 비슷한 플레이를 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2014년부터 대략 2년간 난 셀 수 없이 많은 소개팅을 하였다. 허우대 멀쩡하고 직장도 나쁘지 않다 보니 같은 학교 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 지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소개팅 제안을 해 주었다. 주말에는 항상 소개팅 스케줄이 잡혔고 하루에 두 건 이상의 소개팅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소개팅을 자주 하다 보니 내 시간이 점점 없어졌다. 책도 읽고 친구들이랑 술도 한잔씩 하고 싶은데 학교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개팅을 하러 가다 보니 내 삶이 없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사람을 골라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소개를 받는다고 무작정 다 만난다 생각하지 않고 일단은 간(?)을 보기로 했다. 주선자를 통해 알게 된 상대방의 카카오톡 프로필과 기본 정보 등을 파악하여 내가 원하는 스타일인 여성들과만 약속을 잡았다. 그게 아닌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거절의 메시지를 보내었다.

  “죄송한데, 제가 근래에 일이 좀 생겨서 그쪽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거절하는 경우, 내게 여성분을 소개해 주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던지 숱한 소개팅의 역사동안 나와의 관계가 예전만 못해진 지인들도 꽤 많았다. 일단은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을 것을. 그땐 지금보다도 미성숙했고 이성을 보는 내 시각도 매우 편협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만나기로 한 당일에 일방적인 거절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 거절했다는 얘기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였다. 오래전부터 와이프 친정에 비해 와이프의 이모네는 경제적 사정이 훨씬 좋았다. 안 그래도 이모네 집 식구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와이프와 장모님은 나를 무시했던 그 스토리를 듣고 분노하였다. 다시는 그 집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모녀가 함께 다짐하였다.


  그러다 올해 봄, 도서관에서 우연히 철학박사 강신주의 책을 보았다.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가고 있는데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힌다면,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그 타고 있는 이에게 저리 비키라고 소리칠 것이다. 처음에 소리를 질렀는데 듣지 못하고, 두 번째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한다면, 세 번째 소리를 지를 때는 틀림없이 험악한 소리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전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전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강신주, <강신주의 장자수업(EBS BOOKS)>, 51쪽 중에서

  

  한때, 강신주에 미쳐 있었던 시절 그의 책이나 강의는 거의 다 섭렵했었다. 위 얘기도 그가 예전 강의에서 자주 언급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날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강신주의 책을 읽던 날, 강신주가 말하는 장자는 예전과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운전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운전 중 신호대기로 정차했다가 다시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 출발하려는데 앞 차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자동차 클락션을 울린다. 그럼에도 그 차가 움직이지 않아 클락션을 더 길게 울리는데도 차는 미동하지 않는다. 씩씩거리며 내 차에서 내려 그 차로 가서 차주를 보려 하는데 차에 아무도 없다. 애당초 내 앞차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클락션을 울리며 화를 낼 필요가 있었을까?

  장자의 가르침은 위 상황에서 처음부터 앞 차에 아무도 없다 생각하라는 것이다. 황하를 건너가고 있는데 내가 탄 배에 누군가의 배가 부딪힌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배는 곧 나 자신이다. 내 배를 훼손하는 것은 나를 훼손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불 같이 화를 낸다. 노를 제대로 저었다면 내 배와 부딪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와 어긋난 그의 행동도 화가 난다. 하지만 만약 빈 배가 부딪혔다면? 화가 날 상황도 아니고 소리쳐 봐야 들을 사람도 없다. 아무도 몰지 않았던 배였기에 우연히 내게 부딪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훼손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없다는 것도 굳이 화가 나지 않는 큰 이유이다.

  나를 ‘비운다’는 말에는 내가 갖고 있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내 기대 역시 함께 내 던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는데도 내 앞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 참으로 급한 일 있나 보다 하며 기다리고, 아파트 윗 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 집 아이 참 건강하구나 생각하고, 내가 먹던 밥을 누가 가져가 먹으면 그가 얼마나 배고팠을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을 비웠을 때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강신주에 따르면 결국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자신이 아닌 타자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인 것이다.


  와이프 이종사촌과 우리 학교 체육 교사의 만남을 내가 주선했다 한들 그들이 만난 뒤에 사귀다가 헤어지거나, 한번 만나고 그 뒤로는 만나지 않거나, 애당초 만나지 않거나 뭘 하든 내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갑작스레 만남을 취소한 것을 두고 이는 나를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응원하는 롯데자이언츠가 예상 밖의 연패를 했을 때 “이것들이 날 무시한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잘못된 선입견으로 가졌던 내 불쾌감으로 인해 잘못된 감정에 선동된 장모님과 와이프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이 내 뜻대로 행동해 주리라 무턱대고 믿거나, 사람들이 알아서 나를 대우해 주겠지 기대하는 것은 나를 비우는 것과는 정반대의 마음다짐이다. 바꿔 말하자면 나를 비우고 나서야 칸트 선생이 말한 “인간을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으로”대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자 「산목」 편에서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사람의 목적지는 황하가 아니라 건너편의 육지이다. 그에게 황하에서의 시간은 가급적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그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미래에 달성할 목적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관리하는 전형적인 유위(有爲)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배가 내 배와 충돌하여 반대편 땅에 닿으려는 목적이 방해받으니 화가 날 수밖에.

  장자는 ‘나를 비우기’를 제안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하는 것이 없는 무위(無爲)의 삶을 살기를 바랬다. 그가 살아 있다면 커피를 마시는 것은 잠을 깨기 위함이고 이는 업무에 더 집중하기 위함이라는 식으로 수단과 목적을 계속 분리하며 행복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를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랄 것이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기대와 내 소유욕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목적의식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와이프의 이모 덕분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꽉 채워져’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 역시 내 선생님이셨네. 장자가 제시한 빈 배가 상징하는 것처럼 그저 세상 물결을 즐기며 여행 놀이하며 살게 될 때 밥이나 사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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