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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1. 삶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

by 수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그 삶의 지향점을 찾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전 방식의 유효성을 다시 한번 더 검토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삶의 지향점을 밝혀내고자 우리가 해온 세상과 존재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은 정말로 그 끝까지 간다고 해도 답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까? 자신의 삶의 당사자이자, 타인의 삶의 관측자이며, 또 늘 삶에 관해 고민하는 우리가 삶의 답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물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삶이라는 분야의 전문가처럼 보이는 우리가 굳이 연구 결과라는 이정표에 의존해야지만,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심은 충분히 합당하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기대와 다르다. 우리는 삶을 잘 모른다.


연속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의문을 갖고 구조를 파헤쳐볼 기회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히려 우리는 충실히 삶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삶을 깊게 들여다볼 기회를 놓친다. 일반적으로 의문은 수행과 공존하지 못한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의문을 잠시 미뤄야 하고, 반대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을 위해서는 그 행위 혹은 대상을 긍정하고 수행하는 일을 미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주체로서, 특정 순간을 제외하고는 삶에 관한 의문보다는 결정과 수행에 집중하게 된다. 즉 우리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는 최우선의 목표를 위해서, 더 깊은 고민을 관두는 것이다. 의문을 해소하던 일의 치중했던 지난 순간을 되짚어 보면, 어른이 되면서 우리가 얼마나 삶에 관한 의문과 멀어졌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부모의 품 안에서 아이는 직접적인 결정과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의 아이는 천천히 삶에 관한 의문을 뻗어나간다. 흔히 왜요 병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되어 온갖 행위의 이유를 찾으며, 결국 그러다가 인간과 그 삶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인간 사회의 외부인이라도 된 듯, 어른이 암묵적으로 긍정하고 허용하던 문화나 추상적인 개념에 매우 낯설어하며, 그 개념을 분해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자주 어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사춘기나 취직 직전 역시 세상을 향해 격렬히 의문을 던지는 시기이다.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할 때임을 통감하게 되면서, 어쩌면 앞으로의 결정과 수행만이 넘치는 삶에서 더 이상 의문을 던질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처럼 우리는 어느 순간까지는 삶을 더 깊게 탐구해 볼, 의문이라는 기회를 마음껏 누리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가 되면서부터 의문을 갖기보다 결정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됐다.


그러나 의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된 것은 아니다. 타인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재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던 시기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다시 의문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을 인도해 주던, 회사(집단)라는 곳에서 벗어나 다시 혼자가 될 때면, 어엿한 어른이라고 해도 그 머릿속은 금세 의문투성이였던 시절로 되돌아가버린다. 즉 은퇴한 이들은 사춘기나 왜요 병에 걸린 아이만큼이나 자신의 존재와 삶에 관해 격렬히 고민하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의문을 해소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근거, 그리고 어른이 되어 수행 경험을 쌓는다고 삶에 관한 탐구가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결국 사춘기 청년도, 얼마 전 입사한 신입도, 믿음직스러운 관리자도, 얼마 전 은퇴한 이도 왜요 병에 걸린 어린아이의 질문에 당황하며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반복되는 결정과 수행은 딱히 의문 해소라는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이끌어가고자 그저 수긍만을 반복해 왔기에,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더 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직접 결정하고 수행하는, 삶의 당사자라고 해서 삶을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늘 수긍만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가끔 삶에 관한 의문을 갖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깊이 고민한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심지어 그 고민은 아주 오랜 기록에도 남아있는데, 이는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이 삶에 관한 사색을 해왔다는 근거가 된다. 즉 인간은 삶이라는 분야에 관한 타고난 사색가이기에, 우리가 삶을 잘 모른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그 사색은 답을 내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삶의 지향점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즉 그 누구도 삶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의문에 답하지 못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수많은 천재를 포함한 다수의 인간이 달라붙었는데, 아주 일상적인(해결 난이도와는 별개로 접하기 쉬운) 고민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기대를 한참이나 벗어난, 매우 낯선 이야기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생겼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의 당사자인 우리가 바로 외부인의 시선을 취하며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잠시 우화의 형태로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고자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한 똑똑한 개미는 자신의 일상 속 커다란 불평등을 발견했다. 자신과 주변 자매들은 모두 매일을 지독하게 일하는데, 여왕만은 안전한 굴 안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여왕은 자매들의 노동의 대가를 거의 모두 취해간다. 그리고는 단지 알을 낳을 뿐이다. 이 지독한 불평등이 의미하는 것은 이 굴 안에 있는 개미 모두가 여왕이자 대모인 존재를 위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심을 갖기 시작한 똑똑한 개미는 다른 자매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대부분의 자매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책 없는 고민을 하며, 삶을 비관하느니 그냥 지금에 충실하자며 호통 치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 개미는 동족에게 한탄하는 것을 포기하고 굴에서 공생하는 진딧물에게 가서 한탄을 털어놓게 된다. 마침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에는 오랜 기간 개미와 지내온 장로 진딧물이 있었는데, 그 장로 진딧물은 개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장로 진딧물은 진딧물과 개미가 함께 살아가지만 서로 엄연히 별개의 종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어려서부터 개미의 존재를 신기하고 어색하게 여기곤 했다. 그래서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과는 다른, 개미라는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역시 젊은 날에는 똑똑한 개미와 같이 개미의 본질을 여왕으로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의 폐위를 눈으로 본 이후에는 그러한 가설을 폐기했다.


아직 똑똑한 개미가 태어나기 이전 시절, 전대의 여왕의 생식 능력이 떨어지자 일개미들이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여왕을 추대한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난 후, 장로 진딧물은 여왕개미와 일개미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왕이라는 허울 좋은 말을 쓸 뿐 여왕개미는 사실상 생식 업무를 홀로 부담하는 존재였고, 일개미는 그 외의 일을 부담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즉 개미는 사실 거대한 개미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그들 각각이 하나의 신체 부위가 되는 방식으로 분업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개미가 마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기에, 그 대단한 단결력이 만들어지고 그 넓은 개미굴을 능히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미란 종의 엄청난 단결력의 원천인 분업 시스템을 깨달은 장로 진딧물은 경악하며, 그들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똑똑한 개미 역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자신이 개미란 존재를 잘못 정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존재를 정의한다는, 거창한 시도를 하면서도 턱 없이 부족한 정보만을 다뤘다고 반성했다. 게다가 그 결과의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지난 과오가 남긴 교훈을 더욱 무겁게 여기기로 다짐했다. 자신과 자신의 자매를 여왕의 부속품으로 정의했던 지난날 마주했던 불쾌함과 무기력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땅속 작은 세상의 패자이자 고도로 사회화된 존재라는 정의가 주는 자신감과 활력 역시 작지 않았다. 정보의 차이는 존재에 관한 관점의 차이로 이어졌고, 그 관점의 차이는 일상생활과 미래 목표에 관한 태도의 차이로 이어졌다. 개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이와 같은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이 이야기는 삶을 부지런히 탐구해 나가더라도 실패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다뤄보고자 지식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다른 모든 지식과 같이, 인간과 그 삶에 관한 더 깊은 지식 역시 원 데이터 수집(관측)과 그 데이터를 활용한 추론을 통해서 형성되어 간다고 가정했을 때, 잘못된 결과물이 나오는 이유는 크게 원 데이터 수집에서의 문제와 추론에서의 문제로 나눠볼 수 있다. 뇌 속에서 주관적으로 이뤄지는 추론을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렵기에 일단 추론에서의 문제는 제쳐두고 원 데이터 수집에서의 문제에 우선 집중해 보자. 애초에 추론은 정보 수집 단계를 거쳐서 이뤄지기에 앞 단계에 해당하는 원 데이터 수집 과정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원 데이터 수집에서의 문제라는 것은 비교적 명확히 정의되는 문제이다. 즉 잘못된 지식이 나타난 것은 추론에 쓰이는 원 데이터(정보)가 부족했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엄청난 지성체인 우리가 그리도 깊이 고민하는 삶의 지향점을 밝혀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일반적으로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장로 진딧물이 본 개미라는 종의 모습을 알지 못한 똑똑한 개미처럼 말이다. 더 엄밀히 따져보면, 삶의 지향점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미의 경우처럼 정보 부족으로 자신의 종에 관한 잘못된 정의(추론)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미라는 존재의 본질은 곧 여왕이라는 정의가 개미의 삶의 지향점은 곧 여왕이라는 개체를 향한 희생이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졌듯, 우리는 정보 부족으로 우리를 잘못 정의하기에 그 지향점(목표, 의미, 존재 의의) 역시 도달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의 무언가가 되었다.


이렇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사색가의 추론이 실패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반대로 이렇게 지식 형성의 구체적인 과정을 이해하고 나서야 실패한 과정이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던 과거의 우리는 지식 형성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추론이 어떻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지) 고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인간의 추론이라면 진리에 가까운 답을 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한 정보가 투입되어야 연산을 하고 적당한 답을 낼 수 있는 물리적인 기계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 그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다고 의심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삶의 당사자이자, 관찰자이자, 사색가인 우리가 인간과 그 삶을 제대로 모른다는 주장은 나름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의심이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사자, 관찰자, 사색가가 제대로 된 지식을 형성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이유만을 다뤄왔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경우를 넘은, 더 많은 지식을 통해 형성된 더 깊은 통찰이나 논리를 살피고 반박하지 않았다. 즉 현명한(일반적이지 않은) 선조가 남긴, 삶의 지향점을 향한 특정 논리를 직접적으로 살피고 반박하지 않았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삶의 지향점을 향한 대표적인 논리 하나를 직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이를 통해서 그 현명한 선조 또한 목표에 비해 부족한 정보를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살펴볼 것이다.


일단은 그 논리에 바탕이 되는 개념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우리 삶의 지향점을 어떻게 정의해 왔을까? 삶의 지향점이란, 말 그대로 삶이라는 제한적인 시간이 유지되는 동안 그 당사자인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뜻한다. 이처럼 삶에 지향할 바 자체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흔히 두 가지 사실로부터 이끌어낸 추측이다. 우리는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 누구나 그 삶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암묵적인(무의식적인) 본능이나 합리성이 삶의 이유를 흐릿하게나마 포착했거나 혹은 그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존재는 한다는 사실만은 포착할 수 있었기에 그 영향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지향점을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와 같은 추론은 누구나 하는 고민과 같은 보편적인 행동을 근거 삼아 삶의 지향점의 존재를 추측하기에, 그 실체를 추적하면서 또 다른 보편적인 요소와 연결되곤 한다. 바로 제한된 수명, 죽음이다. 즉 누구나 주어진 삶 동안 최대한 무언가를 해보고자 고민하고 발버둥 치는 것은 누구나 언젠가 그 삶의 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는 우리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사는 동안 의미 있는 무언가를 좇도록 하는 요구는, 끝이 정해져 있기에 그동안의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갖고, 무엇을 얼마나 해야지 그 조급함이 담긴 요구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흔적이 담긴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있다. 현명한 선조가 오래전에 남긴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끝과 삶의 지향점의 관계를 더 깊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알만한, 아주 오래된 책에서 나오는 한 왕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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