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도다.”
왕의 마지막 말이었다. 과거, 그 왕은 한 고대 왕국의 왕으로서 왕국을 번영시켰다. 영토를 늘리고, 그 유지의 혈육과 혼인해 지배 관계를 굳건히 했으며, 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통찰 있는 예술가였다. 그는 세상 속 온갖 것들을 탐구하고 또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통치 업적뿐만 아니라 창작 업적도 기리며 그의 탁월함을 칭송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모든 것을 이뤘던 것이다. 수많은 업적을 이뤘고, 많은 칭송을 받았으며, 대단한 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고, 부만으로는 누리기 어려운 지적인 취미까지 누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의 와서 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고백했다.
죽기 전에 와서 내린, 그 대단한 삶이 별거 없었다는 평가는 반대로 지금까지 누린 그 수많은 것이 죽음에 비하면 무가치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그 왕이 노인이 되어가면서 까지 연장해 온 삶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또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지만 떳떳하게 답하지 못했을 때, 그 기분은 얼마나 끔찍할까? 분명 남의 일임에도, 왕의 처지에 공감하며 상상해 본, 그가 던졌을 질문과 그가 느꼈을 기분은 너무나 생생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왕만이 겪은 특별한 일이 아닌, 끝이 예정된 모두가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역시 마지막에 지난 삶에 관한 평가를 겪을 것이며, 또 그 결과가 기대이하일 때 지난 과거에 관한 후회와 현재의 무력함 그리고 미래에 관한 두려움이 섞인 감정, 즉 허무한 마무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끝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다 보면, 그 끔찍한 마무리만은 피해야겠다는 조급함에 휩싸이게 된다. 어쩌면 그 강렬한 조급함이야말로 삶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이정표인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것은 더 산다고 허무한 미래를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일단 더 살아간다는 것이다. 더 살아도 큰 의미를 얻지 못하기에, 지금 스스로 끝을 맞이하거나 나중에 타의로 끝을 맞이하거나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름에도 일단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 끝을 내지 않고 더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마음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지한 생존 욕구를 버리지 못한 것인지 혹은 진짜로 끔찍한 끝을 극복할 희망의 실마리를 잡은 것인지는 모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삶을 더 나은 가치와 의미로 채워야 한다는 느낌, 혹은 그 어딘가에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줄 답이자 지향점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마 후자가 우리의 삶의 동기를 더 잘 설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 역시 후자에 가깝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채워 넣었는지 모른다. 그 왕은 투자한 열정 이상의 대단한 성취를 이뤄, 우리가 우러러보는 대부분의 가치를 손에 넣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부로 온갖 쾌락을 누렸으며 지적유희마저 충족했다. 마음과 몸 그리고 주변 인물까지도 만족으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결국 과거를 후회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무기력하게 끝을 맞이했다. 그 대단한 왕조차도 무언가가 부족했거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것이다.
왕은 무엇을 놓친 것일까? 도대체 그 지향점이라는 것은 무엇인 걸까? 왕의 후회가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을 무작정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 그 끝에서 오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삶을 무가치한 오답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그 지향점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일단 지향점의 목표는 확실하다. 지향점은 죽음의 허무함(유한한 수명)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허무함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방법 중 하나는 허무함의 구성요소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대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 허무함은 구체적으로 과거에 관한 후회, 현재의 무기력함, 미래의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가정 하에 각 구성요소에 접근해 보면, 일단 가까운 미래에 마주할 끝을 향한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해소하는 일은 다른 구성요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제하기 쉬워 보이는 과거의 후회나 현재의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것이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후회와 무기력함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과거를 만족으로 채우고 삶에 관한 통제감을 회복하는 방법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만족스러운 경험을 쌓고 세상에 관한 통제감을 성장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즉 삶의 지향점(의미이자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흘러가는 삶을 만족으로 채울 방법이란 무엇일까? 만족감과 같은 주관적인 감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만족과 같은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특정 결과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목격한 결과를 만족스럽다고 해석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주관적인 만족감이 인지된다. 즉 우리는 실제로 성취 혹은 성공에 가까운 결과를 마주하고 그 뒤에 그 결과를 만족스럽다고 해석하는, 두 절차를 통해 주관적인 만족감을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장기적인 측면에서 결과와 해석은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갖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아주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매번 만족스럽다고 해석하는 일은 어렵다. 따라서 보통 장기적으로 만족감을 쌓기 위해서는 그 결과와 마음 모두 만족이란 방향으로 통제해야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결국 허무함을 극복할 삶의 지향점이란 결과와 마음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방법이다.
드디어 삶의 지향점이라는 것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다. 허무함을 극복할 방법이란 삶을 통제할 방법과도 같았다. 우리는 결과와 그 결과로부터 오는 경험을 통제함으로써 허무함을 극복할 만족에 가득 찬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처럼 진실처럼 보이는 명제를 차근차근 쌓아서 결국 삶의 지향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답은 논리를 쌓는 여정에서 겪은 고생만큼의 가치가 없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당장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의 지향점은 우리가 사실상 손에 넣을 수 없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삶과 삶에 관한 경험을 온전히 통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온갖 만족을 경험한 고대 왕보다 더 큰 만족을 경험하기 위한 완벽에 가까운 통제를 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통제라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통제는 절차에 따르는 몇몇 행동의 합을 일컫는 행동이다. 일단 통제를 위해서는 애초에 기대하는 결과가 존재해야 한다. 통제란 기대한 결과와 실제 결과가 같을 때 내려지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또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하다. 즉 통제에는 목표와 계획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전에 미래를 예측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예측한 미래 흐름 안에 ‘나’라는 변수를 추가하며 자신이 원하는 결과와 경험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와 계획을 설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이러한 예측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예측하고자 하는 대상과 관련된 변수를 최대한 많이 파악하고 그 변수가 가진 움직임의 법칙을 최대한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변수가 존재하는지 알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또 어떻게 상호작용할지를 알고 있어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통제라는 행동은 몇 가지 구체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외부 변수를 포착하고 그들의 움직임 및 상호작용에 관한 정보를 이용해 미래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예측에 자신의 바람과 실천 가능한 개입을 대입해 목표와 계획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실제 결과를 마주하고 나서야 통제 여부가 정해지고, 통제라는 행동의 과정이 끝나게 된다. 반대로 보면, 결국 통제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외부 변수에 관한 정보와 규칙(외부 변수 움직임 혹은 상호작용에 관한 방정식)의 이해도(완성도)이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는 완벽한 통제라는 높은 목표에 비해 턱 없이 모자라다. 우리는 원하는 결과와 경험을 마주하기 위한, 세상과 자신의 마음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다. 정보 생성을 위한, 각종 변수를 포착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온갖 한계 중에서 두 가지만 다뤄보자면, 우선 우리의 포착(관측) 능력은 그 범위의 한계가 있다. 즉 우리는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변수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변수 중에는 우리 시야 밖에서 우리 시야 안에 있는 것에 충분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측할 때, 시야에 닿지 않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기에 우리의 예측은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또 애초에 우리가 시야에 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관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눈과 또 우리가 변수 관측을 위해서 사용하는 온갖 도구들은 그 렌즈에 세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예를 들면 아주 작은 것들을 담지 못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무언가로부터 튕겨져 나온 여러 종류의 빛을 우리가 가진 렌즈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너무나 작고 가벼운 것들은 빛에 닿을 때, 자신 역시 튕겨져 나간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나 그 빛이 우리 렌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우리가 가진 렌즈를 통해 그려낸 세상은 너무나 작은 것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의 현실과 다른, 과거의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작은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는 완전한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일 만큼, 커다란 변수와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변수와 더 작은 움직임 역시 모두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세상을 완벽히 알 수 없고 미래를 완벽히 알 수 없다.
완벽한 통제를 향한 엄격한 관측 기준을 외부 세상(결과)이 아닌 마음에 적용시켜 봤을 때에도 결국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만큼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그 대단한 정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만큼 신경 세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측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반적인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 혹은 뇌와 관련된 제대로 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다. 보통 우리가 인지하는 정보 대부분은 우리 내부보다 외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정보, 지식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정보는 그 종류를 분류하자면 감각 정보에 해당한다. 즉 마음, 의식이라는 모니터에 떠오르는 정보 대부분의 원 출처는 감각기관이다. 그리고 감각기관은 보통 피부를 기준으로 외부에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정보를 수용한다. 반대로 감각기관은 신체 내부에서 생기는 사건에 관한 정보는 잘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의식 역시 신체 내부에서 생기는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감각기관과 그로부터 정보를 받는 우리 의식은 배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가 어떤 장기에서 생기는 일인지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고 그것이 어떤 사건으로 인한 결과인지 제대로 추적하지 못한다. 이는 의식이나 마음을 포함한 모든 정신적인 활동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라는 장기에도 당연히 해당되는 이야기다. 보통 우리가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하듯, 우리는 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이라는 경험 또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 눈과 의식은 세상과 뇌(마음)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바라는 통제 수준은 우리 능력에 비해 턱없이 높기만 하다. 인생이 만족으로 넘쳐날 것만 같은 대단한 고대 왕이나 엄청난 부자도 그 끝에 허무함을 고백했고, 마음을 능히 다스릴 것만 같은 현자나 연구자 역시 그 끝에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의 성취로는 부족할 것이다. 즉 우리가 바란, 허무함을 극복할 통제란, 엄청난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완벽한 수준의 통제를 의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현재 우리는 그 어떤 대단한 도구를 통해서도 통제에 필요한 사전 과정을 완벽히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완벽한 통제를 손에 넣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가능한 목표를 좇아 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럴듯한 노력을 다시 되돌아보면 이 황당한 실패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우리(혹은 선조)는 누구나 늘 삶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한다는 사실과 누구나 삶의 끝이 가까워졌을 때는 그렇게 채운 삶을 평가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평가가 누구에게나 아주 큰 영향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근거 삼아서, 예정된 삶의 끝이야말로 인간이 그 삶을 의미나 목표로 채우도록 하는 원동력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즉 당장 끝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삶을 끌고 가는 이유는, 그 시간 속에서 끝에서 마주할 허무함을 극복할 나름의 방법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의 추론을 통해서 그 방법을 결과와 마음의 통제로 특정 지었지만, 고대 왕의 선례와 우리가 가진 한계는 그것이 오답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앞선 논리의 흐름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면, 사실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완벽한 통제라는 말도 안 되는 답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선 논리의 흐름에서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놓치며 중요한 정보 하나를 고려하지 않았는데, 바로 목표는 그 기한이 정해져야 구체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애초에 언제 어떻게 끝을 맞이하게 되느냐가 정해지지 않고서는 그 끝과 함께하는 다양한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목표 역시 특정되지 않는다. 정해진 수명이 얼마인지에 따라서 마지막에 하게 될 평가와 그 결과에 따른 감정 역시 크게 다라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목표나 의미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우리 수명이 젊은 날에 끝날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때 우리가 생각보다 너무 이른 끝을 마주하면서 하게 될 고민과 감정은 아주 긴 세월을 겪으며 천천히 늙어 온 그 왕이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면서 했던 고민과 감정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가 그 고대 왕처럼 장수하다가 끝을 마주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목표를 고려했다.
끝이 주는 다양한 영향이 남은 삶을 의미와 목표로 채우게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반대로 그 의미와 목표는 당연히 끝이라는 순간과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정의된 다음에야 정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추론을 비약시켰다. 다시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논리의 흐름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왕의 의문과 감정에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 또한 미래에 죽음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합쳐서 미래에 자신이 겪게 될 마무리의 형태를 섣불리 정했고, 그때 느껴질 의문과 감정도 섣불리 정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자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상황(왕의 마지막)과 우리가 실제로 겪게 될 상황(마지막)은 각 상황을 구성하는 변수의 종류가 매우 다른, 사실상 다른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우리는 깊은 공감(사회적 정보)에 눈이 멀어 지나친 비약을 놓쳐버렸다. 혹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문제라는 모호하고 있어 보이는 단어에게 속아, 사실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애초부터 우리는 끝을 특정하기 위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비약적 추론을 더해 추론을 억지로 이어나가거나 해당 논리 흐름을 통째로 폐기하는 것뿐이었다. 즉 우리는 앞서 다룬 정보 수집 능력의 한계로 인해 애초부터 끝이라는 미래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예측할 수 없다.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불확실한 사건으로부터 구체적인 삶의 목표와 계획은 만들어질 수 없다. 결국 삶의 지향점에 관한 이 오래되고 유명한 논리는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아마 당시에는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부터 나왔을, 삶의 지향점의 실체를 죽음이라는 보편적이고도 강렬한 사건으로부터 추론하는 이 방식은 아주 오래 지지받았으며 또 지금도 여전히 대중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했듯, 사실은 그 속에 비약적인 추론과 그로 인한 오류가 존재했다. 이는 반대로 이 논리가 그 오랫동안 그 많은 사람을 거치는 동안에도 우리가 어렵지 않게 발견한 오류나 비약이 발견되고 대중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매우 합리적이라고 믿어왔던 지성체가 벌인 이 황당한 사건의 원인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다뤄온 한 가지 사실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우리가 인간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그 삶을 꿰뚫어 보려고 했고 그 지향점을 정의하려고 시도했기에, 정보 부족이 잘못된 지식(추론)이란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지나치게 사회적인 동물은 일반적으로 동료가 만들어낸 지식을 엄밀하게 분석하고 반박할 의향이 없었고(애초에 반박을 위한 충분한 정보가 없기도 하다.) 또 의문을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 지식이 대중적으로 지지받는 다면 그 흐름에 반할 의도는 더욱 적어지기에, 일정 이상의 지지가 확보된 지식은 오랫동안 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다른 대부분의 논리 역시 상황이 유사할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다시 단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근거로 한다. 물리적 존재인 인간은 투입된 정보를 아주 크게 뛰어넘는 답과 논리를 형성할 수 없다. 사고란 뇌 속 전기 신호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즉 추론의 한계를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생각, 우리가 뇌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어떤 이치나 진리가 담긴 아카이브에 닿을 수 있는 판타지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그 근거가 아주 미비하다. 우리 존재에 관한 이와 같은 한계는 선조들 역시 해당되기에, 분명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했을 그들이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절대적인 지향점(진리)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이 판타지적 존재를 기본 전제로 한 비약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인간이 정보 습득 능력의 제한과 추론 능력의 제한을 지닌, 물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현대보다도 더 열악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절대적인 답과 관련된 내용을 가진 현대 이전의 다양한 논리는 모두 필연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