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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추천하는 글, 특정 지식 체계를 강요하는 글, 연구 논문
인간의 삶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주장이지만, 이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신경 세포의 작동방식과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삶에 답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실현시킬 수단이 삶의 지향점(목표 혹은 의미)과 지식 체계(과학, 경험, 합리, 신학 등)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과 달리 정답에 도달하는 일은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예상과 다른 실패를 마주하며, 깊은 곳에 존재하는 믿음을 탓하기보단 그 수단이 잘못되었다는, 표면적인 반성을 하곤 한다. 이러한 반성이 반복된 끝에, 결국 우리는 다양한 지향점과 지식 체계 중에서 가장 우월한 한 가지만이 유일하게 정답에 도달할 자격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여러 번의 실패를 겪으며, 답에 이르기 위한 길 혹은 수단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결론 때문에 삶의 지향점과 지식 체계에 관한 이야기는 가볍지 않다. 우리는 그 결론이 곧 자신의 삶을 정답이라는 구원으로 이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에 해당 주제는 사적인 영역을 넘어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삶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정보의 종류에 관한 이야기는 참견과 싸움을 부르곤 한다. 그러다 보니 삶의 지향점과 과학이라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담판 짓고자 하는 두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루는 이 책 역시, 참견과 싸움을 부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정답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오해가 나타나기 쉽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그러한 독자들을 향해 몇 가지 해명을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1. 삶에 관한 고민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을 읽을 것을 권유하지 않는다. 앞서서 이야기했지만, 이 책은 그 목표 자체가 더 큰 만족이나 행복보다는 방황이나 고통의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족을 더 크게 하는 방법과 방황의 근원을 해결하는 방법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특히 이 책에서 제시할 방황 해소 방법은 감내해야 할 것이 많기에, 굳이 고민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책은 방황을 목표의 부재 상태로 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 설명하고자, 우선 목표 구성을 위해 필요한 과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목표,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자신에 관한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과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정보 수집과 기존의 정보를 응용한 확장, 즉 추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정보의 선별 기준과 오류를 피하기 위한 추론 방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지식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미 이러한 고민이 충분히 반영된, 특정 규칙을 통해 형성된 공유되는 지식의 뭉치, 즉 특정 지식 체계를 추종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지식과 추론에 관한 기준 형성이 곧 특정 지식 체계를 추종하는 일처럼 되고, 그 지식 체계 하에서 세계관과 인간관이 형성되며, 마지막으로 세계관과 인간관을 통해 목표가 만들어진다.
즉 목표(지향점) 부재를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접근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목표 형성을 위해 선행되어 형성되어야 하는 인간관, 세계관 혹은 지식 체계에 관한 기준을 검토하고 수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책의 목표인, 삶의 지향점을 심리 과학을 통해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곧 목표 부제(방황)를 해소하고자 세상과 자신에 관한 기존의 사상을 넘어 그 근간이 되는 지식 체계를 심리 과학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는 기존에 자신이 믿고 따르던 것을 부정하거나 해체하는 더 깊은 방황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감내가 필요한 일이다 보니, 더더욱 모두가 아닌, 방황이라는 특정한 문제를 겪는 이들에게만 추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에 관한 고민이 없는 독자라면, 또 그중에서도 타인이 주장하는 삶과 지식 체계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주장으로 여기며 거리를 둘 수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여기서 덮으시는 것을 권유한다.
2. 특정 지식 체계만이 정답에 도달할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이 책에서 심리 과학을 택한 것은 방황 해소에 적합하기 때문이지 정답(혹은 진리)에 도달할 수단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지식 체계와 정답(진리)의 도달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고자, 지식과 과학이 존재하는 이유에 관한 한 가지 가설, 그리고 앎이 삶에 주는 영향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 가설이란 바로, 지식을 형성하고나 공유하는 행동이 생존 활동에 필수적인 예측이라는 행동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있는 환경이란 수많은 변수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공존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한 개체가 자신의 바람을 온전히 실현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수많은 생물이 놀라울 만큼 긴 기간 동안 그 어려운 일(보통은 불완전하게)을 해낸다. 바로 수많은 상호작용의 파도 속에서 자신이 생존하고 있는 미래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생존이란 가까운 미래와 환경을 통제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환경과 미래를 통제한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상화작용의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제라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미래에 관한 예측(시뮬레이션)이 선행되어야 이뤄질 수 있다. 즉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가 설계 상 생존을 지향한다는 가정 하에, 온갖 정보가 모이는 신경 세포 뭉치가 주로 하는 일이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또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어서 눈치채고 있지 못하지만 예측과 통제는 생존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하고 빈번하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정확한 예측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변수는 일정한 움직임을 갖기 때문에 그것을 반복적으로 관측하고 학습함으로써 세상에 관한 규칙 몇 가지를 파악할 수는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제한적으로나마 예측할 수 있다. 즉 생존을 지향하는 생명체는 환경 예측에 필요한 정보를 형성하고자, 환경 속 변수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그 움직임 속의 일정한(반복될) 규칙을 추론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동물인 우리는 함께 살아남고자 자신이 배운 규칙을 언어로 정리해 동료와 공유한다. 특정 변수가 특정한 움직임을 갖기에 앞으로 특정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설명하며 이를 공유하는데, 우리는 이를 정보 혹은 지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식을 공유하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사람마다 관측한 내용이 다르고 또 사람마다 추론 방식이 달라 이끌어낸 규칙이 달라지기에, 결과적으로 분명 같은 대상에서 이끌어낸 지식임에도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식 공유라는 상호작용을 하다 보면 ‘믿고 공유할만한 지식, 정보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고민은 지식 구성에 관한 다양한 기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 기준 그 자체 혹은 그 기준을 통해 쌓인 지식의 집합체가 바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의) 체계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과학이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때로는 변화하기도 하며, 또 애초에 기준에 관한 합의는 때에 따라서 암묵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기준은 없지만, 그럼에도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를 선택한 이유와 그것을 정답과 별개로 보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고자,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가 갖는 특징에 관해서 조금 더 다뤄보겠다. 지식 즉 미래 예측에 사용될 일반적인 규칙이란, 특정 변수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관측해 얻은 원 데이터를 가공해서, 즉 추론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지식이란 무엇을 어떻게 관측하고 그것을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하나의 데이터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 왔다. 즉 확장성 혹은 추론의 범위를 고민해 온 것인데, 이에 관한 고민은 우리 존재에 관한 한 가지 또 다른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바로 우리가 진리 혹은 이치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추론의 범위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절대적인 지식이 담겨 있기에, 추론은 그 방법만 옳다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지식은 관측한 원 데이터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추론은 그럴듯해 보일 뿐, 세상의 이치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세상의 이치(움직임의 규칙)를 찾으려면 실제 세상에서 생긴 일(원 데이터)에 더 비중을 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현대에서의 과학은 보통 인간의 추론이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다. 특히 심리 과학은 정신 현상이 뇌라는 물질에 얽매여 있다고 여기기에, 정신이 갑자기 뇌를 넘어 외부 비물질세계까지 확장되어 이치와 접촉해 전혀 새로운 지식을 가져오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과학은 보통 인간의 추론 능력이나 직관이 이치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추론이 원 데이터에 얽매이지 않고 이치나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특정 지식 체계와 과학이 누가 진리에 도달하기에 더 적합한가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앞서서 이야기했듯, 우리는 관성적으로 철학, 신학, 과학과 같은 지식 체계가 삶의 답 혹은 진리라는 길에 도달하기 위한 자리를 두고 경쟁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과학을 그러한 경쟁과 무관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또 이 때문에 보통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는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로 통용되는 지식을 다루지 않는다. 관측한 원 데이터를 함부로 확장하지 않으면서 지식을 형성한다는 것은, 사소한 차이라도 일일이 모두 관측해야지만, 비로소 그것을 지식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약간의 변수가 추가된 상황을 추론할 때, 머릿속에서 기존의 상황에 관한 방정식에 해당 변수로 인한 영향을 추가하며(즉 그냥 기존의 지식으로부터 확장해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간 달라진 상황을 굳이 따로 관측해 근거를 마련한(검증한) 뒤에야 지식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식 형성 방식을 갖기에, 언제 어디서라는 통용되는 지식을 형성한다는 것은 곧 특정 대상에 관한 모든 경우의 수를 형성하고 검증(관측)했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학은 미래에 관한 기댓값만을 얘기하거나, 혹은 특정 상황의 경우에는 아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알(예측할) 수 없거나 유력한 가설만이 있다고 답할 뿐이다. 이 때문에 과학 지식을 안다고 자신의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단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검증되지 않았기에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앎이 늘 직접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래서 과학이 삶의 지향점을 잃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이치나 진리를 지지하는 다른 지식 체계와 달리, 절대적인 지향점을 그 지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특정 지식 체계가 절대적인 지향점 혹은 절대적인 지양점으로 정의하고 더 자세한 설명을 해놓지 않은 영역까지 딱히 차별하지 않고 더 자세히 조사한다. 즉 결론을 내리지 않고 검증을 반복하며, 여전히 대부분을 미지수로 두고 아주 조금씩 나아간다. 이러한 지식 체계는 그 의도와 별개로, 가치를 지향하다 실패한 존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과학을 접하며, 지향할 바와 실패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구분할) 기회를 가지게 될 수 있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하며 실질적인 개선 방법을 계획할 수 있다. 그래서 반대로 자기 비난에 압도당하거나, 명확한 대안이 없기에 겁에 가득 질려 실패가 도사리는 미래로 내몰리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거나 특정 지식을 깨우치는 것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마주할 수 있다는, 어린아이의 꿈과 같은 이야기가 실현될 수 있다면 분명 좋겠지만, 나는 그런 것을 믿을 여유가 없었다. 불신에 가득 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크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것이었다. 답이 없어 보이는 삶(혹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살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을 위해서 과학을 택했기에 정답이나 진리를 좇는 과정은 이 책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당연히 이는 개인적인 경험과 해석이 많이 담긴 주장이니, 사람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3. 순도 높은 새 과학 지식을 기대한 독자에게
이 책의 최우선 목표는 과학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기에, 과학 지식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여러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지는 않았다. 즉 이전 맥락에서 이어서 설명하자면, 이 글은 원 데이터를 갖고 상대적으로 더 과감한 추론(확장)을 더 많이 시도했다.
물론 과학적 지식 형성을 위한 추론의 제한선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심리 과학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원 데이터를 수집하는 관측 과정에서부터 이미 추론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심리, 마음, 정신은 관측할 수 없기에, 행동이나 뇌 활성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관측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간접 관측된 데이터가 우리가 원래 측정하고자 했던 것과 관련이 높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해지게 된다. 대부분의 심리 과학은 이렇게 간접 관측된, 혹은 추론이 더해진 원 데이터를 갖고 다시 추론을 더해 지식을 쌓아 올린다.
당연히 심리 과학을 다루는 이들 역시 이를 알기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가 견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변덕스러운 존재로부터 얻어낸 관측 데이터 중에서 일정한 것만을 뽑아내기 위한 여러 통계 기법을 고민한다. 또 학자에 따라서는 천천히 많은 데이터를 쌓아가며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일을 매우 경계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과학이란 지식 체계를 직접 쌓아가는 사람이자 동시에 그 체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쌓는 지식을 스스로가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렇게 간접 관측에서 시작하는 분야에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과학 지식이 탄생하곤 한다.
다만 나는 연구자가 아니라 삶의 방황을 끝내고 자하는 사람으로서 충분치 않더라도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몇몇 부분은 조금 섣부른 확장이 있었는데, 책을 쓰는 동안에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고민이 있었다. 삶의 목표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목표를 좇으며 사는 인간의 내면(정신)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여러 연구 결과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내면의 일부를 모으고 그것들을 나름 설득력 있게 이어 붙인 결과, 그 내면에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완전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게 짜 맞춘 내면의 그림이 사람과 삶의 목표를 완벽히 설명해 주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는 작게 빈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엄밀히 따지자면 이어 붙이는 방식에 관한 논의가 더 필요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과도한 확장의 결과이자 빈틈이라고 여길 부분이 있음에도 일단 그것을 활용해 삶의 목표에 관한 결론을 내렸다. 더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보단, 방황을 끝내고 다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당연히 참조나 검토와 같은 기본적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서서 지식을 쌓아 올려준 사람들만큼의 엄격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이란 지식체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그 체계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이를 엄밀히 따지고 먼저 고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를 이해하고, 이 책을 대할 태도를 잘 결정하시길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