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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by 수민

보는 이에 따라서 내 인생은 망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삶의 지향점을 밝히겠다는 목표에 매달리다 보니 공부에 부족함을 느껴 대학교를 2년 더 다녔고, 졸업 후에는 멀쩡히 일하다가 일과 목표 추구를 병행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일을 관두고는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삶의 지향점을 찾기 위한 공부만 하고 싶어서 대학원도 가지 않고 홀로 논문을 읽으며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며 30대 초반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직업이 따로 없다. 또 아직도 이 과정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 시간이 더 필요한 상태이다.


내 입장에서는 이러한 삶이 그다지 유별난 거 같지는 않다.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특별하진 않아도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 맛 정도는 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잘 모르겠다면, 혹은 타인의 인생과 선택은 딱히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한 번 자신의 자식이나 형제 혹은 절친한 친구가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이전과 달리 조금 더 깊게 몰입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그 삶을 평가하는 과정 내내 30대 백수, 3년 공백과 같은 키워드로부터 눈을 떼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구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흔히 삶의 목표나 삶의 의미라고 부르는, 삶의 지향점을 찾아내거나 추구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독자라면,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일단 이 책은 당연히 그와 같은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그 내용의 핵심이 되는, 지금까지 우리가 삶의 지향점을 찾지 못하도록 만든 장애물과 그 장애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저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삶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삶에 관한 자신만의 기준(생각)을 응용해야 하는데, 이 기준이 때로는 삶의 지향점을 향한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올바른 이정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의 삶이 망했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장애물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망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기 위해서는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기준선이 먼저 정의되어야 한다. 따라서 삶에 관한 평가를 내리고 그러기 위해 자신만의 기준선을 응용했다는 것은, 특정한 삶의 형태를 정답으로 여기고 그에 반대되는 삶의 형태를 오답으로 여기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정답은 곧 지향할 바로서도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은 삶의 지향점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된다(이와 같은 주장의 더 자세한 근거는 본문에서 다룰 것이다.). 즉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항상 정답을 손에 넣을 방법(정답지와 같은) 역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뻗어나가게 되고, 더 나아가 그렇다면 그 방법을 손에 넣고 응용해 삶을 정답으로 채우게 되면 그 삶은 정답에 가장 가까운, 성공적인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결론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주 단순화시켜서 표현했지만, 많은 경우 삶의 지향점에 관한 정의는 이와 같은 흐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답지를 손에 넣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의 지향점을 가진 이들은 언젠가는 실패를 겪게 된다. 그러한 실패는 분명 자신의 이전 판단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고칠 부분을 찾는 계기가 되지만, 앞서 설명한 그럴듯하고 촘촘한 논리의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거나, 모든 논리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 세울 만큼의 동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정답이나 정답지의 실재 여부에 관한 비판적인 검토까지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 기본 전제가 되는 내용은 고쳐지지 않고 정답지의 후보로서 여겨졌던 항목에 오답 표시만 추가되는 일만이 반복된다. 이렇게 삶의 지향점이라는 개념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기 시작한다. 삶의 지향점의 실체를 향한 논리까지는 납득했는데, 정작 그 실체는 여러 번의 실패와 그로 인한 부정으로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삶의 지향점을 좇으며 경험하게 되는 실패는 사람과 삶에 관한 정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심리 과학은 이 기준을 반박할 수단이자, 사람과 삶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근거를 제공하고, 그럼에도 마치 착시나 환시처럼 우리가 그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강렬하게 믿게 될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 이러한 설명은 정답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우리의 생생한 경험이나 그에 관한 추상적이거나 문화적인 설명을 반박할 근거가 된다. 즉 심리 과학은 이렇게 정답과 오답이라는, 사람과 삶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관점 역시 제공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나 혹은 우리의 총지휘 탑에 해당하는 뇌를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와 그 삶을 이해하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의 삶을 나름 만족스럽다고 평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무작정 긍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해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논리이자 관점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에서 할 일은 저자의 삶이 망했다고 평가하는 논리 체계를 가진 사람을 저자의 삶이 망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심리 과학적인 논리 체계를 가진 사람에게까지 다다르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람과 삶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일이자, 그 지향점 역시 다르게 정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다양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현재 내가 찾은 삶의 지향점을 밝힐 유일한 방법이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변화가 필요한 대상을 명확하게 마주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하는, 과학적인 근거의 촘촘한 참조 없이 이루어진, 삶의 지향점의 실체를 향한 추론의 문제점을 보다 명확히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심리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그럴듯한 기본 전제와 이치를 통해 구성한 삶의 지향점에 관한 논리 하나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그 논리를 분석하며, 우리가 가진 추론의 한계를 마주해 볼 것이고, 이를 보완할 다른 방법의 필요성에 관해 고민해 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해도 이 오래되고 굳건한 논리 체계로부터 깨끗하게 독립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또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감을 잡기도 어렵다. 앞서 설명했듯 이 때문에 우리는 삶의 지향점을 향한 추론의 근거가 되는 기본 전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번째, 기존의 삶의 지향점에 관한 논리를 뿌리부터 반박할 논리를 형성하고 또 한편으로는 변화의 기준을 잡기 위해서, 삶의 지향점의 형성 과정을 심리 과학적으로 추적해 볼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의 엄청난 통찰력과 합리성이 삶의 지향점을 꿈꾸게 한 것이 아니라, 뇌가 원래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지향점을 만들어냈다는 증거를 확인해 볼 것이다. 이는 인간과 그 삶의 지향점에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는 정신, 마음 그리고 그들이 가진 통찰력과 합리성과 같은 권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기에, 기존의 삶의 지향점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된다. 즉 과학이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적이고 관성적인 지식 체계에 비해 인간이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인과)을 더 잘 설명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인간과 그 지향점을 정의하기 위한 기본 전제를 형성할 새로운 기준이 되는 자리에 심리 과학이 더 적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것이다.


세 번째 단계와 마지막 단계는 그렇게 기존의 논리가 무너진 자리를 과학이라는 기준을 잡고 채워가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세포와 뇌가 가진 관성에 맞춰 사람, 존속, 지향점(목표)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 볼 것이다. 우리와 관련된 추상적인 개념은 주관적인 경험, 집단적인 합의, 행동 관측 데이터, 뇌 관측 데이터 등을 근거 삼아 정의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관측 기술의 발전보다는 사유 방식의 발전이 더 빨랐기에 주관적인 경험을 통한 추론, 그리고 그 추론 결과에 관한 집단적인 합의가 어떤 개념의 의미를 정립하는데 주로 쓰였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정립된 개념이 강력한 위상을 갖게 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행복(에우데 모니아)을 인간의 목적으로서 정립한, 행복에 관한 개념 정의가 그렇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 정의는 그 위상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인 데이터와는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행동과 뇌에 관한 관측 데이터가 생겼을 때, 개념에 관한 대중의 혼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시 행복으로 예를 들자면, 최근에 뇌 촬영 기술이 발전하며 여러 데이터가 나오고 대중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대중들은 행복을 보상 회로 활성화의 결과 중 일부로 바라볼 것인지 전통적으로 그래왔듯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관해 혼동을 겪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개념을 정립할 때 그 근간에 우선 행동과 뇌에 관한 관측 데이터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인 추론과 집단적인 합의를 반영하는데 특히 해당 추론과 합의가 일정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이유에 관한 심리 과학적인 기저까지 파악해 반영하면 더 완성도 높은 개념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 생물의 일반적인 목표인 존속(생존), 사람이라는 특수한 생물에게 있어서 지향점(목표)이라는 개념을 정의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렇게 정의한 개념 하에, 삶의 지향점을 추구하고자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을 다뤄볼 것이다.




조금은 어렵고 또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기꺼이 완주하기 위해서는 몰입할 필요가 있고 또 명확한 동기를 형성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사람에 따라서 몰입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책은 삶의 지향점이라는 친숙한 주제를 다루면서, 그것을 심리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접근을 한다. 새로운 시도를 그것도 과학이라는 전문성이 필요한 수단으로 하고 있기에, 저자가 그에 관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는지에 관해서 의심이 생길 수 있고, 그 결과 몰입을 방해받을 수 있다. 또 무엇보다 이 책은 애초에 인간과 삶에 관한 일반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책이다(후술 하겠지만, 이는 삶의 방황이 깊어진 독자에 한해서 적용되는 주장이다.).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일반적인 너희의 생각은 다 틀렸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주장을 마주하다 보면 저자가 책을 쓴 이유 자체가 지적질과 자기 과시를 통한 자존감 형성 및 유지일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될 수 있다. 몰입을 방해하는 이와 같은 신뢰의 괴리를 해소하고자,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또 나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책은 삶의 지향점을 찾는 일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 대안을 찾지 못하고 방황에 빠져버린 이들을 위해 쓰였다. 사실 가장 먼저 고려한 독자는 나 자신으로, 이 책은 제 자신의 삶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명확한 논리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갈 힘을 되찾고자 쓰였다. 즉 나는 삶의 지향점을 찾는 긴 여정 속에서 실패와 방황에 빠져있었지만, 살고자 한다면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에, 결국 다른 것을 포기하고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결국 끝까지 가게 된 이 끈질긴 관계는, 선생님의 한 마디를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늙어버린 것일까? 후회돼. 너희는 이렇게 살지 마.”

담임선생님은 그야말로 정석적인 어른이었다. 한평생 해가 뜨면 집을 나와 해가 질 때까지 일하는 것을 반복해 왔고, 이제 그 권태로운 반복으로부터의 해방인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또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괜찮은 사람을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일 또한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일반적인 삶은 그 긴 여정의 끝에 다다라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 권태로운 여정을 정석적으로 소화하는 대단한 일을 해낸 만큼 그녀가 무언가 대단한 의미 혹은 영광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정도의 대가가 있었다고 해야지만, 그녀의 찬란한 젊음이 기꺼이 바쳐진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며, 지난 세월을 부정했다.


선생님의 한탄은 삶이 한없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흐른다는 일은, 그것도 타인과 그 삶이 섞여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일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부조리하다. 이 부조리함이 그나마 납득되고 삶이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흐른 세월이 어떤 의미 있는 과정으로서 치환되기에, 우리가 어느 정도는 그 대가를 보상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반듯하게 흐른 세월조차 기대했던 만큼의 치환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맥락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자, 선생님의 한탄 속에 녹아 있는 과거를 향한 후회와 미래를 향한 두려움 그리고 소진된 젊음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무기력함에 더 생생히 공감할 수 있었고, 삶의 부조리함에 치를 떨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의 뚜렷한 삶의 목적은 나 자신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 끔찍했던 감각을 재현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되었다.


한편 선택과 판단의 응집체인, 지난 세월을 부정하는 어른의 모습은 내 안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줬다. 똑 부러진 선생님조차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긴 시간 반복해 왔기에, 타인의 판단이나 주장에 쉽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계심은 삶의 지향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반복하며 수많은 실패를 겪는 동안 특정 지식 체계에 관한 선호로 발전했다. 반복된 실패는 믿거나 믿지 말 것을 가르는 기준을 더 명확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주관적 깨달음이나 권위를 근거로서 하는 주장(지식)은 잘 참고하지 않게 되었고 그 반대에 위치한, 재현 가능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서 하는 주장을 주로 참고하게 되었다.


이처럼 나는 선생님과 같은 삶을 살지 않을 방법을 찾는 일에 매달려서 살아왔다. 그 삶이란 답을 찾고 폐기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과정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결과를 마주할 방법을 찾아내고서는 얼마 안 가서 의심이 올라와 재검토하고, 결국 반박에 성공해 폐기하고 마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결국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방법은 없다는, 회의적인 논리와 결론에 다다랐다. 이러한 결론은 곧 선생님과 같이 부조리함에 삼켜지는 결말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았다.


그러자 삶이 마치 부조리함이라는 오물로 가득한, 까맣고 찐득한 늪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있을 때면, 나라는 존재가 그 늪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과 느낌에 휩싸였다. 이르지만, 선생님이 경험했던 결말이 눈앞까지 와있었다. 그런데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말이 다가왔을 때, 정작 느껴지는 바는 회의감이나 망연자실함이 아니었다. 살고 싶음이 느껴졌다.


나는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이 표출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단서로서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 단서를 토대로 다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참고한 결과,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은 결국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삶)을 납득할 방법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렇게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내려진 결론을 기준으로 잡고 다시 써 내려간 글이 이 책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불신에 가득 차 새로운 결론에 반신반의한 나 자신이 확실한 결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쓰였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살아가고 싶지만, 방황에 빠져 그러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구 결과를 근거 삼아 삶이라는 과정을 납득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 책은 삶의 지향점을 주제삼은 대부분의 책과 달리 누구에게나 삶이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특히 이미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더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를 마주할 방법을 추천하고자 쓰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방황하지 않는 이들이나 이미 다른 종류의 믿음과 삶의 지향점을 굳건히 구축한 이들을 굳이 지적하거나 반박하고자 하지 않는다. 선택지가 없어진 이들에게 탈출구를 제시할 뿐 모두에게 적용되는 더 나은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이 이와 같기에 당연히 지식을 과시하고 그것을 통해 타인의 가치관을 지적하며 지적 허영심을 형성하고 자존감을 보충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 쓰인 이와 같은 책을 굳이 발간까지 하는 것은 내가 경험했던 고된 방황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방황의 발생하는 이유에는 현대 사회의 지분이 크다. 현대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자신만의 지향점을 찾아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요는 기술의 발전과 전문화 및 개인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잦은 기술의 발전은 자주 생활양식을 크게 바꿔 놓는데, 그러한 삶의 변화는 개인이 기존에 갖고 있던 삶의 지향점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뤄지곤 한다. 즉 그러한 변화는 가끔 특정 개인이 갖고 있던 기존의 삶의 지향점 혹은 장기적인 목표를 좌절시킨다. 예를 들어, 최근 AI의 발전은 인간의 창작과 관련된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그것을 지향점으로 두고 삶을 계획하던 사람들을 좌절시켰다.


이러한 좌절, 즉 기존의 지향점에 관한 반박은 사람들을 두 가지 결론으로 인도한다. 먼저 변화하는 기술을 좇아가지 못하면, 직업 생활을 포함해서 여러모로 도태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변화하는 기술과 삶에 적응하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갖게 된다. 한편 지속되는 발전과 변화로 또다시 여러 지향점이 반박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걱정은 어지간한 변화에도 반박당하지 않을, 더 궁극적인 지향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으로도 이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이라는 거센 흐름에게 빼앗긴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더 궁극적인 지향점을 찾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처럼 현대인은 각각 시간과 노력이 많이 투자되어야 하는 두 가지 목표를 갖도록 압박당한다. 잦은 변화와 그로 인한 부담은 시도 때도 없이 두 가지 목표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기에 둘 중 한 가지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대부분은 둘 모두에 다리를 걸치게 되고, 그래서 두 가지 목표 모두를 해결하고자 더 적은 시간으로 더 만족스러운 답 혹은 성과를 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는 극복하기 아주 어려운 상황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조상은 이와 유사한 악조건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 왔었다. 예부터 우리는 이러한 제약 조건을 주로 사회적인 정보를 활용하면서 극복해 왔다. 즉 부족한 시간에도 더 나은 답을 내고자 이웃의 지혜를 응용한 것이다. 실제로 같은 무리의 구성원이라면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이웃 혹은 이웃 어른)이 내렸던 결정을 참고해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보통 좋은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전문화되고 개인화된 현대 도시 사회에서는 애초에 가깝게 지내는 무리가 잘 형성되지 않고, 또 무리가 있다고 해도 무리 내부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가 않다. 현대인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근거가 될, 자신과 비슷한 결정을 하거나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 주는 이웃들에게 둘러 쌓여있지 않다. 그래서 현대인은 제약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홀로 조급하게 지향점을 찾아 헤매어야 한다. 그리고 지지해 주는 이웃도 충분한 시간도 없는 그 방황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앞으로 기술의 발전은 더 자주 더 많은 것을 바꿔 놓을 것이고, 우리의 삶은 그 영향으로 더욱 편해지는 한편 더더욱 다른 이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아 관계의 해체는 가속화될 것이기에, 외로운 방황 혹은 그 끝의 실패로 내몰리는 개인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긴 시간 고민하고 공부하며, 문뜩 애초에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삶에 관한 고민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에 관한 고민의 동기나 원인을 분석해 보니, 나 역시 한 명의 현대인으로서 시대적인 영향을 깊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특별히 뛰어난 통찰력이나 합리성 혹은 끈기를 가졌기에 답을 찾을 때까지 방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분명 고민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는 선생님이라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긴 세월의 동력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 그 고민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멈추지 못한 이유를 그나마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은 나 역시 다른 평범한 현대인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인정해 주는 이웃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결론을 따라 나는 이것이 나만의 문제 혹은 나만의 고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방황을 해소하기 위해 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내가 잘 아는 끔찍한 고통을 내 이웃이 겪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몰입의 진입장벽이 되는 다양한 불신과 의문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고 생각한다.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 자신이 누린 것을 나와 비슷한 이들 역시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담긴 여정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사실 그전에 그럼에도 염려하는 바가 있어서, 몇 가지 경고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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