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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1. 지식, 과학 그리고 인간에 관한 과학

by 수민


더 정교한 지식은 충분한 정보에 체계적인 추론이 더해져서 만들어진다. 사람, 삶 그리고 그 지향점에 관한 더 정교한 지식 역시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가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의 허점이 보이기 때문이며, 그 허점의 원인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했음에 있다고 의심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그 삶의 지향점에 관한 대중적인 논리는,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을 거쳐 왔음에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 원인을 파고들다 보면 살아가는 동안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생각보다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택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다 보면, 반대로 의문을 갖고 삶을 탐구할 기회는 적어진다. 만약 삶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눈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부지런히 관찰하며 지식의 재료를 충당하지만, 그럼에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사람의 내면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외면한 끝에 생기는 것은 정보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추론의 비약이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비약을 더한다. 실제로 삶의 지향점에 관한 오래된 논리에는 정보의 공백을 극복하기 위한 비약이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정보의 부족을 외면하고, 추론의 비약을 외면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논리를 적극적으로 믿고 따라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다 근본적인 전제 하나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가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더 나은 추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물리적 생명체라는 것이다.

지식 생성이라는 정신적인 과정을 투입물(정보)이 공정과정(추론)을 거쳐 산출물(지식)이 되는, 제품 제작 과정이라는 물리적인 과정에 비유하는 것은, 해당 정신적인 과정 역시 사실은 뇌라는 물리적인 실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부터는 추론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신경 세포 사이를 오가며 정보가 지식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전혀 바라볼 수 없는 우리는, 정신이나 마음, 영혼과 같은 가상의 공간 혹은 존재를 만들어서 그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우리는 사람을 비물질적이면서도 물질적인 존재로 바라봤다. 이러한 사상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 인간의 내면에서 생기는 일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여러 근거를 남김으로써, 반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최신의 증거보단 자신이 자연스럽게 겪어온 일을 더 신뢰하곤 한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인간과 그 경험이 모두 물질로 설명될 수 있다는 입장에 어색해한다. 결국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인간이 지식 형성에서의 물리적 한계와 관계없다고 오해하곤 한다.


즉 우리는 사람을 잘 모른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우리는 물리적 실체로서 사람을 잘 모르며, 그러한 지식의 근거가 되는 여러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머리 안에는 이미 정반대의 인간관이 굳건히 자리 잡아 다른 인간관의 형성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사람과 그 지향점에 관한 지식은 허점과 비약이 발견될 만큼, 덜 정교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처럼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다면, 더 나은 지식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과학적 근거를 확보해 물리적 실체로서의 사람에 관한 지식을 형성해 볼 수 있다.


이번 장과 다음 장에서는 그 익숙하지 않은 접근을 하기 위해서, 대략적인 그림을 먼저 접해보고자 한다. 즉 구체적인 근거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전에, 대략적인 주장이나 맥락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과학 지식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일까? 혹은 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과학 지식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째서 사람을 물리적인 생명체로써 바라보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의 특징을 살펴봐야 한다.




다만 독자에 따라서는 충분한 자격이 없는 자가 주장하는 과학의 기준을 신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위해서 이러한 독자를 먼저 설득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일단 먼저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면 앞으로 다룰 과학관이란, 모두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을 명시하고자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 자신은 이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자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인 과학관과 그것을 구성하는 논리를 굳이 공유하는 것은 앞으로 이어질 개인적인 인간관과 그것을 구성하는 논리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즉 주관적 인간관의 바탕에는 주관적 과학관이 깔려있기에, 사전 지식에 해당하는 과학관을 먼저 소개함으로써 인간관에 관한 이해를 더 수월하게 하고자 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과학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명 주된 주장에 바탕이 되는 요소인 만큼 최선을 다해 논리를 구성했으나, 절대적으로 옳은, 단 하나의 과학관을 정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이것만이 진짜 과학이니 이것을 따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청난 자격 혹은 권위를 요구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애초에 어째서 과학을 논하는 데 있어서 자격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러한 자격 혹은 권위에 관한 요구는 과학의 틀이라는 것이 고정적이고 굳건한 형태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학의 틀 혹은 과학의 정의라는 것은 일반인 입장에서는 명시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과학이라는 개념의 특징이 이와 같기에, 나름 현명한 현대인인 자신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과학의 정의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것을 명시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란 아마 해당 분야에서도 아주 뛰어난 전문가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과학에 관한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이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모여 합의한 개념 혹은 암묵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떤 절대자가 권능을 발휘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감히 손댈 수 없는 틀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며, 또 인간이라는 존재와 별개로 이미 실존하던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창조한, 지식 형성을 목표로 긴 시간 합의해 온 규칙이자 개념이다. 해당 개념(규칙)에는 긴 시간에 걸쳐 다수가 관여했고, 또 매번 모든 구성 요소를 명시하지는 않고 만들어졌다. 그 결과 그 기준의 일부는 명시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또 시대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과학을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무언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형성한다는 목표는 명시적이고 또 선조들의 고민이 담긴 역사가 전해져 오기에, 해당 지식 체계의 참여자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기준(과학관)의 간극을 좁힐 수는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기준은 존재하기에, 당연히 해당 지식 체계에 속하지 않거나 무지한 외부인이 함부로 그 기준을 뒤흔들 수는 없기도 하다. 즉 절대적인 기준은 없어도 해당 지식 체계의 참여자들만의 적당한 기준은 존재한다. 하지만 해당 지식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착각할 수는 있다. 외부인 입장에서는 그 적당한 기준을 가늠(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조심스럽기에, 그것이 가끔 자신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앞서 다뤘듯, 이러한 착각은 반대로 감히 그 기준을 손대려면 엄청난 자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진다. 아주 단순화시켜 표현하자면, 과학을 논하려면 노벨상을 탈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은 자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그 틀이 참여자들에 의해서 일부는 암묵적으로 합의되기에, 외부자의 입장에서는 그 틀에 관한 잘못된 환상을 갖기 쉽다. 그러한 환상은 과학의 틀을 제대로 이해하고 논할 수 있는 자에 관한 환상(과한 기대감)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환상은 과학이라는 틀의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지만, 그 환상은 분명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즉 실제 과학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따라서 과학을 제대로 마주하고 그에 관한 지식을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폐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논하는 과학관을 그 자격만으로 검토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이 책이 지식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이 책은 지식을 인류가 공유하는 각종 변수에 관한 여러 일반적인 규칙으로 바라보며, 이러한 지식을 형성하기 위한 체계 중 하나가 과학이라고 바라본다. 즉 정보가 추론을 거쳐 지식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적용되는 세세한 규칙과 그 규칙을 준수해 쌓인 지식을 지식(형성) 체계로 정의하고 그 체계 중 하나를 과학으로 바라본다. 한편 지식 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규칙이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무런 이정표 없이 형성되었을 때, 공유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형태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규칙이란 사실상 잘못된 지식이 형성되도록 기여하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식 체계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과학이란 체계의 특징은 한 사람의 머리 안에서 생긴 지식을 타인이 믿고 따를 때의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집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의 특징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 형성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해소하고자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단 다시 지식 형성 과정을 살펴보며 어떤 위험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자.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정보가 뇌를 거쳐 인지(조정)되고 그것을 통해 일반적인 규칙을 추론한다는 거창한 과정은 그 복잡성과는 별개로 사실 대부분이 개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주관적인 과정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 가진 감각기관의 차이(개성) 혹은 실수(예를 들어 착시), 추론을 위한 추가 정보의 부족 혹은 추론 방법의 미숙함 등이 그대로 반영될 위험이 있다. 아무런 경계 없이 이러한 지식을 그대로 믿고 따르다 보면, 지식에 명시된 상황이 나타났지만 기대했던 규칙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강이 안전하다는 마을 어부의 말만 듣고 수영하러 강에 들어갔더니 악어를 마주치게 되는 참사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지식이 만들어지는 각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여러 보완 방법(규칙)이 제시되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과학은 여러 시도가 남긴 것을 반성한 결과라고 볼 수 있기에 우선 과거에 어떤 방법이 제시되어 왔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그 방법 중 대부분이 추론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정보 수용과 추론 과정에서의 경험의 차이로부터 발생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수용된 정보가 신경을 타고 뇌의 몇 부위를 돌아 인지되기까지의 과정(관측이 정보로 치환되는 과정)을 의식할 수 없고, 그렇기에 직접 통제하거나 개선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추론 과정은 비교적 선명히 인지되기에, 개선의 여지를 발견하는데 용이하다. 즉 우리가 그 과정을 관조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인해(혹은 단순히 정보량의 차이에 따라), 두 과정에 관한 개선 방법의 수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는 우리가 수용한 정보의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하며 자신이 인지한 정보의 진실성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선택과 결정을 적절한 빈도수로 이어나가고자, 정보 공백이 주는 영향력에 관한 고려를 최소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지할 수 없는 정보 치환 과정의 정교함에 관한 의심을 거둔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장기적인 지향점에 관한 논리를 형성하는 우리의 모습으로부터,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정보의 공백을 외면하는 모습을 확인한 적이 있다. 두 상황이 유사하기에, 정보의 공백을 극복하고 선택과 결정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일이 비슷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번에도 역시 정보의 공백을 가리고자 비약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연인지 운명인지, 다음과 같은 오래된 명제는 우리의 한계를 한 번에 극복시켜 주는 너무 편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종 변수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고 우리가 그것에 닿을 수 있다.’ 우리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순간의 우연이거나 자신만의 착각으로 인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혹은 미래의 자신)도 똑같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확인할 방법을 갖지 못한다. 이로 인해 특정 변수를 몇 번 보고 유추해 낸 예측, 즉 다음에 그 변수를 마주했을 때 발생할 것 같은 일(지식)을 믿고 타인 혹은 미래의 자신과 공유해도 되냐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앞선 공통 본질에 관한 이야기는 이러한 의문을 해소해 준다. 변수마다 본질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관측자가 포착한 것은 해당 변수의 표면적인 부분이자, 본질의 일부가 반영된 부분이다. 따라서 포착한 내용 그 자체는 상황과 관측자마다 다를 수 있으나 그 안에 존재하는 본질(혹은 본질적인 규칙)은 같다. 마침 사람이라는 합리적인 지성체는 이성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그 본질을 발견할 잠재력을 지녔기에, 좋은 추론 방법만 사용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한, 본질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무엇을 봤든 본질에 관한 내용만 정제해 낸다면, 그것은 충분한 자격을 지닌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필 우리가 인지하고 조절할 수 없는 일(관측 내용을 정보로 치환하는 일)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우리가 인지하고 조절할 수 있는 일(의식적 추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아주 편리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처럼 지식이 만들어지는 여러 과정 중에서 사실상 우리가 접근하기 쉬운 부분만을 보완하는 내용을 가진 지식 체계는 본질과 지성체라는 가정과 함께하며, 일정기간 주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본질이 있다는 증거 혹은 인간이 그것에 닿을 수 있다는 증거는 없기에, 우리가 편의를 위해 창조한 개념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고 관측 방법이나 기술이 발달하며, 비약과 그 위에 쌓인 지식에 반하는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했다. 완전무결해 보였던 지식 체계와 가상의 개념의 조합은 그렇게 서서히 반박당했다. 또 애초부터 모두가 그 지식 체계 속 비약적인 부분에 의문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주류였던 지식 체계도 나름의 명맥을 이어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추론 방법만을 보완하는 지식 체계에 관한 다수의 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대안이 주류로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과학(의 일부)이 그 대안 중 하나였다. 특히 과학은 기존에 주류였던 지식 체계와 달리 지식의 근거가 되는 정보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는 추론 이전의 정보 역시 보완의 대상으로서 여긴다. 이 때문에 앞서서 이야기했듯, 공유라는 일이 이뤄지기 위해서 고려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요소에 더 많이 집중한 지식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과학은 지식의 근거가 되는 정보를 객관화시켜 추후 다른 이 역시 검증할 수 있는 형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우선 관측하고자 한 변수와 그 변수의 움직임 혹은 상호작용에 관한 내용을 명확하게 정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지식 제작자)의 관측을 재현할 수 있도록, 해당 변수와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한 환경을 형성할 방법을 설명한다. 한편 그럼에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한 변수가 해당 상황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에 상황 재현에 있어서 기댓값 역시 공유한다. 이렇게 과학은 서로 다른 관측자가 최대한 같은 것을 관측할 수 있도록 한 다음, 그들이 정말로 같은 정보를 경험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학은 지식 형성 과정 자체를 실험과 같은 누구나 재현 가능한 형태(반대로 누구나 재현할 수 없는 것에는 깨달음이 있다.)로 공유하며, 공유할 지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것을 그 대상으로 삼기에 보통 과학 지식의 대상은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부 물질(혹은 그 움직임)이다. 과학이 물질적이라는 이야기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 안에 오직 관측할 수 있는 물질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잘못된 생각이다. 지식의 생산자인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측할 수 없는 것이 기존 지식에 혼란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을 보완할 기회를 주기에, 지식 체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그 예외를 설명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먼 과거의 것이나 너무나 작은 것, 혹은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 등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굳이 신경 써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무언가를 보거나 알지는 못해도 그와 얽힌 인과에 영향은 분명 관측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애초에 관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은 관측한 변수와 그 움직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무도 건들지 않는 물건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우리가 보지 못한 무언가, 예를 들면 유령이나 물체 내부 속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추론한다. 이렇게 우리는 종종 기존의 예측 공식이 무너지는 것을 마주하며, 이전 지식 제작자가 차마 포착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닿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기존의 예측 공식이 무너지는 일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이 많기에, 지식 형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얻을 수 없고, 지금 당장 마주한 상황 속 모든 변수를 포착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계가 있는 우리가 만든 지식은 언젠가는 반박당하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초에 인지조차 하지 못해 틀리게 된 것이니 직접 반박당하는 상황을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기존의 지식이 반박당하는 상황이란 우리의 한계가 놓친 요소를 구체적으로 추론해 보기 위한 기회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식 체계에 기여하는 이들은 예외 상황의 원인이자 지식을 보완할 기회가 되는 보이지 못하는 무언가에 관한 경우의 수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직 검증되지 않는 가설 역시 그 체계 안에서 공존한다. 다만 당연히 이러한 가설은 시간이 흐르며 기술의 발전 등의 이유로 관측 증거가 확보되며 검증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결국 지식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사람이 쌓아가기에, 지식 생성의 지향점이란 비현실적인 목표인 완벽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인 최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지식의 한 종류인 과학 역시 해당된다. 과학은 분명 추론과 정보 수집에 있어서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상황과 관측자에 구애받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반복적인 검증을 우선시하게 된 지식 체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증되지 않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 역시 모든 것을 완벽히 검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검증되지 않는 부분에 관한 가설과 공존한다.


하지만 당연히 그러한 가설을 만드는 데 있어서 다른 지식 체계와 다른 점을 갖는다. 과학은 해당 가설을 만들고, 관측하지 못한 요소와 그 움직임을 추론하는 데 있어서 관측할 수 있는(검증할 수 있는) 현상에 더 비중을 둔다. 즉 마치 퍼즐을 맞출 때 확실한 가장자리부터 맞춰가듯, 관측할 수 있는 요소를 단서로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다시 가설을 만들게 되는 과정을 다루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 보자.


우리는 우리가 파악한 변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예측하지 못한) 상호작용의 결과, 즉 현상을 관측하거나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관측하거나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추론하게 되고 그 요소를 밝혀내고자 몇 가지 가설을 만들게 된다. 이때,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는 주로, 이미 파악한 변수와 그들의 움직임, 그 힘에 관한 영향으로부터 관측하지 못한 부분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여긴다(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 영향을 관측함으로써 관측하지 못한 부분을 간접 관측할 수 있다고 여긴다. 즉 이미 관측한 변수를 근거로서 최대한 활용해 관측하지 못한 부분과 예측하지 못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물론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 안에서도 그 정도는 연구자마다 주관적이다.). 그에 비해 일부 지식 체계는 관측하지 못한 변수를 추론하면서, 관측한 기존의 변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를 가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는 관측할 수 없는 마음(정신, 영혼)의 존재를 믿고 그 존재에 공감하는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실제로 관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단 관측할 수 있는 뇌나 행동을 더 연구한다. 그에 비해 다른 지식 체계 혹은 일부 연구자는 마음이나 영혼과 같은, 다른 요소에 주로 영향을 주기만 하고 거의 받지는 않는(주로 영향을 수용하는 부분은 비물질적이고 발산하는 부분은 물질적인) 가상의 존재가 실존한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다뤘으면, 이제는 과학이란 지식 체계에 관한 대략적인 틀에 관한 감을 잡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은 검증과 관측을 중요시하지만, 우리의 능력이 제한적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검증하고 관측하지 못한 부분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 역시 해당 부분에 관한 가설을 만들어 지식의 확장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해당 부분을 가능하면 최대한 관측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요소로 설명하고자 한다.


처음 다뤘던 부분까지 더해 정리하자면, 과학은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변수와 운동, 상호작용으로 구분하고 그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타인도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어야 공유할만한 지식이 만들어진다고 여긴다. 다만 이와 같이 노력해서 쌓아나간 규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한다. 과학은 해당 예외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변수나 움직임으로 두고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에 관한 경우의 수, 즉 가설을 만들어 해당 현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다만 이때,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를 둘러싼, 가시적인 변수로부터 상호작용을 적극적으로 주고받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이미 관측한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 가설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처럼 전체 검증 과정을 일반화하고자 하는 노력과 가설 생성에 있어서 관측(기존의) 근거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의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우리가 지금까지 파악한 변수와 그 움직임만으로 완벽히 설명(검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이나 자신의 경험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한 관측 정보를 갖지 못한다. 즉 사람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여준다. 사람들은 왜 마치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까? 사람들은 왜 자신과 그 동족이 공통 지향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할까? 사람들은 왜 물리적으로 분리된 서로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한 듯이 행동할까? 애초에 나 자신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당연시하며 의문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의 답, 즉 범인이 특정되지 않기에 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즉 마음, 공통 지향점, 공감 등은 그것이 나타난 현상(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는 실존하는 변수가 특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엄밀히 따져 보자면, 우리 조상은 그러한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무언가를 찾을 수 없기에, 마음, 공통 지향점, 공감과 같은 가상의 개념을 해당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서 만든 것이다. 사람을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이와 같은 요소(마음과 같은 가설, 개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직 완벽히 검증되지 않는 가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에 관한 지식은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따라서 검증된 것이 많은 분야와는 다르게 과학 지식을 쌓는다는 개념을 더 엄밀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해당 분야에 관한 여러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먼저 가설이라는 것이 어떠한 맥락에서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또 과학이 검증과 관측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식 체계라는 것을 모른다면, 비과학적 가설과 과학적 가설을 혼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혼(혹은 정신이나 마음)의 존재를 과학적인 가설로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그 자체가 이미 특정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다. 이는 영혼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확인하며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신체와 구분되는 신체의 소유자이자 통제자가 존재하는 것만 같은 주관적인 경험을 하며, 이 놀라운(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자 경험을 설명하고자 영혼의 존재를 흐릿하게 그린다. 그리고 타인을 관측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자신이 겪었던 주관적인 경험이 타인에게도 존재한다고 추론하게 된다. 이러한 동조를 통해서 영혼은 가설로서 더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즉 나 자신만 영혼의 존재를 추론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있지만, 타인 그것도 모든 인간이 같은 것을 느낀다면 영혼이 실존할 가능성이 꽤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영혼이라는 개념은 이미 관측한 변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특정 경험과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자 가설로서 탄생했다. 또 한편 관측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최대한 동원해서 해당 경험과 행동을 설명하지 않았기에 사람에 따라서는 이러한 영혼이라는 가설이 과학적이지는 않은 가설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따라서 이미 첫 단추가 과학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끼워진 영혼이라는 개념을 과학적인 가설을 통해 지지하겠다는 것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반박하지 않는 이상, 잘못된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영혼과 같은 개념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고 또 자연스럽게 동조받게 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그 개념이 어떠한 맥락에서 생겨났고 또 과학 지식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혼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개념을 현대에 가장 대중적인 지식 체계인 과학과 혼용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편, 지식 체계에서 가설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이 검증과 직접 관측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개념만 숙지하게 된 경우에도 인간에 관한 과학에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에 관한 과학이 주로 가설 혹은 간접 관측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한 검증과 관측 증거가 비교적 부족한 인간에 관한 지식이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에 편입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우리는 한계를 갖기에 지식의 재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 가설 혹은 간접 관측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확장하고자 노력한 결과이다. 이는 과학이라는 울타리 속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분야마다 그 비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그렇다고 과학이라는 울타리 속 가설이 무분별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는 가설을 만드는 데 있어서 변수 간에 영향을 가정하고, 검증되고 관측된 단서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노력한다. 심리 과학도 이를 따르기에 심리 과학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에 관한 과학 지식을 다루면서 지금의 수준에서 검증하지 못하거나 관측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철저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직 목표나 의도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가시적인 변수 혹은 일련의 가시적인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에게 생존이라는 목표가 있다는 주장의 증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살아남고 그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일에 수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것을 반복적으로 관측하며, 그러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계속해서 근거가 보충되며 현재 지식 체계 속에서 그 자리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몇몇 변수와 그 움직임을 유전자 존속 지향이라는 가설의 맥락에서 해석하곤 한다. 이처럼 아직 완벽히 검증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인정받고 쓰이는 가설은 검증 방법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많은 노력의 결과이다. 따라서 아직 현대 기술 수준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그럼에도 그 존재를 설명하고자 여러 간접적인 근거를 쌓아 가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눈으로 그 근거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만을 가지고 해당 가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다.


이처럼 과학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인간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종류의 실수를 하게 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실수가 만들어지는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는 일을 통해서 인간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조금 더 구체적인 기준을 잡을 수 있다. 따라서 드디어 과학관의 간극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가정하고, 사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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