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진 곳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물 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땅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 부부의 노래도~
1996년 처음 대학이란 곳에 가고 학교 교정에는 동아리 소개를 하는 천막들이 길목 길목에 있고 그중 한 천막에서 저 노래가 나왔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이랄까 꼬마가 솜사탕가게의 솜사탕을 쳐다보듯 난 그 천막으로 가서 그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가난한 삶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을 읊어 주는 가사 세월은 무지몽매한 젊은이를 무지몽매한 늙은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제 난 무작정 서울행 버스를 탔다 약속도 없고 알고 있는 지인은 한 명이 있었지만 약속도 안 한 상태였다. 그래도 약간의 목적지를 만들고자 서울시립미술관을 목적지로 급히 만들어 보았다. 미술관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었으니 약간의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다. 시청역에 내려서 길을 걸으니 서울 북부지방의 특유의 정다운 느낌의 길이 여전하다 90년대랑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가니 어느 작가의 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너무도 큰 사이즈의 그림에 압도된다 저 물감의 양이며 캔버스의 크기며 본격적인 그림 감상을 하지만 해 본 적이 없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기가 힘들다 결정적으로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그림이 다 비슷하고 뭔가 빈 느낌이다 고통을 모르는 자의 자기 이야기랄까 취향 차이겠거니 하지만 나오면서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이 거대한 공간을 빌려 수많은 관람객에게 메시지를 줄텐데 이게 과연 선택성이 있는 것인가 마치 고도의 함정 같기도 하다. 그건 내가 무지하니까 그렇게 거니하고 난 또 길을 잃었다.
갈 곳은 없다 그냥 조금 걸어보기로 한다. 무작정 걷다가 성공회서울교구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니 어느 커피전문점인데 마치 이 시간을 멈추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마치 데이비드 호퍼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길은 막다른 길이라 다시 걸어 나와 을지로 쪽으로 걸어가다가 복권을 한 장 산다. 난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이다. 여기는 확실히 90년대 느낌이다 슬픈 추억이 있는 경복궁 근처를 지나가니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외교넘버의 차량이 지나간다 그때도 분명 그랬는데, 걸음을 안국역 쪽으로 향해본다 어디선가 빵냄새가 향긋하게 밀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무리 지어 야외에 테이블을 놓고 빵과 음료를 먹고 있다. 나는 안국역 사거리의 횡단보도에 멈추어 있다가 브람스란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발을 종로 쪽으로 옮겨본다 길의 풍경들이 달라진다 세운상가의 어느 골목이다 아주 옛스럽다 길을 모르니 어느새 인사동 비슷한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아주 좁은 골목 사람들이 많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다시 낮 술을 하는 고기 골목을 돌아 나와 길을 건너니 이번에 느 귀금속 가게의 유리창 속에서 여자들이 나를 보고 자꾸 손짓한다 들어오라고 그들은 뭔가에 쫓기고 불안한 표정이다 조금 걷다 보니 도로가로는 포장마차가 장사를 준비 중이고 상점들은 공구상가로 바뀌어갔다 어디선가 쇠냄새 볼트의 쇠냄새가 공기를 둘러싼다.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난 여기 오기로 되어 있었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노래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퀵서비스의 오토바이들 그 풍경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그 이미지가 나의 머릿속에 있다 여기도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왜 멈추어진 곳에 친근함을 느끼고 마치 자궁으로 회귀하듯 찾아온 것일까 공구상가들 골목을 걷다가 광장시장 속으로 잠깐 들어갔다 그 녹두전을 파는 중심가에는 여전히 소음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서 간단히 한잔 하려다가 욕구를 참고 또 걸어 나와본다 다리가 너무 아프다 길에는 약국이 많다 이 약국들은 다 형광등을 엄청 켜놓았다 무슨 의미일까 약사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눈매가 아주 매섭다 빈틈이 없다 저런 눈매는 난 썩 좋아하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누군가가 버린 계란판 위의 계란 부스러기들을 둘러싸고 부리로 사정없이 두들겨 대고 있다.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멈추어진 거 항상 멈추어진 거 어머니 같은 그런 거 말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을 찾으려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난 너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철을 타고 돌아온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가 내 어깨를 주기적으로 스치며 졸고 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온다, 이 시간도 그때와 같네 나는 핸드폰에 있는 책을 열어본다 인간실격을 읽어 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난 인간실격의 마음이 들 때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곳을 그 시절의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 좁은 어깨를 빌려 졸던 아가씨는 급히 일어나더니 내렸다. 그녀도 지금 그곳으로 간 거겠지 멈추어진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