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 그거.. 해요...
아무렇지 않은 척 글을 쓰기에, 조금 쑥스러워 이렇게 안부부터 물어보아요. 오랜만이죠?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출근을 안 하니까 다른 것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 다시 자주 볼까요? 이렇듯 뻔뻔한 게 제 매력이에요. 저는 음, 많은 일이 있었어요. 조금 속상한 일도, 열받은 일도, 짜증 나서 벽을 부수고 싶었던 일도 있었지만 즐겁고 재밌었던 일도 있었어요. 이미 인생의 희로애락은 다 겪어봤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비슷한 결의 희로애락만을 느낀다는 게 참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다가오는 자잘한 불운과 행운들은 제가 일희일비하도록 만드네요.
당신을 만나지 않은 동안, 저는 여행을 다녀왔어요. 눈이 녹으면 봄이 왔다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요. 성인 키만큼이나 눈이 쌓이고, 건물의 일층도 눈으로 전부 가려지는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눈을 치웠어요. 옷은 가벼웠지만 모든 사람들이 방한 부츠만큼은 단단히 챙겨 신고 빨강 노랑 초록의 삽으로 눈을 푸는 광경이 근사했어요.
저는 한 번도 눈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땐, 적어도 허리깨까지 오는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보고 싶어 했는데, 그런 눈사람을 혼자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혼자서 기껏 완성해 낸 눈사람은 너무 작아서 눈 요정이라고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렸죠. 더 자라서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 눈 내린 뒷 산을 올랐어요. 돌 담 위의 눈도, 눈 위에 떨어진 낙엽도 전부 아름다워서 카메라에 담았어요. 사진 몇 장 찍고 나니 할 일이 없어 시린 손으로 돌아왔죠. 약간은 쓸쓸했던 기억이 나요.
사실 눈을 싫어해요. 한 때는 눈을 싫어한다고 말하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이 싫어서 오기로라도 눈을 좋아하려 해 보았지만 어느덧 솔직하게 눈이 싫다고 인정하는 어른이 되었네요. 정확히 말하면, 눈 온 뒤 진창이 된 길과 얼어붙은 땅이 거추장스러워요. 그 거추장스러움에 불만을 토하면서도 좋은 어른을 꿈꿔요. 작은 기억 하나하나 기원하듯 탑을 쌓아 올리며, 엉성하게 쌓인 탑 주위로 탑돌이를 하는 삶이에요.
길게 돌아오긴 했지만, 이곳의 눈은 싫지 않았어요. 그거 아세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스노우타이어를 사용한대요. 그래서 눈이 질척이지 않고 바슬바슬한 그 상태로 남게 된다 하더라고요. 여행동안 저는 웬만해서는 질척이는 눈과 얼음 바닥을 밟아보지 못했어요. 그저 밟으면 뽀득 소리가 나는 영원히 그 상태로 남을 듯한 하얀 눈과 눈의 연속이었어요. 온통 하얗고, 조금은 회색인 그런 곳에서 평소엔 인식하지 못하던 색들까지 존재감을 발휘하더라고요. 참, 눈이 어찌나 많이 오든지 사진에 찍힌 눈발을 보면 느낌이 좀 오시려나요?
어디서부터가 땅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내린 곳도 있었어요. 어째서 눈은 세상을 고요하게 만드는 걸까요? 정적 속에서 온통 하얗기만 한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나뿐이라는 그런 감각에 휘말리기도 해요. 자연이 선사하는 노이즈캔슬링 같은 거죠.
겨울의 우기를 이번 여행에서 처음 들어봤어요. 어쩐지 눈이 스콜처럼 확 내리다가,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맑았다가 그러기를 반복하는데 일기예보는 전혀 쓸모가 없었어요. 어떤 날은 눈사태주의보와 눈보라 주의보가 떴다가도, 갑자기 하늘을 보면 보랏빛과 주홍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 있었어요. 이 지역의 가로등은 대개 주홍색이었는데, 그게 눈 오는 밤과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온통 하얗고 회색인 세상도, 예기치 않은 색들이 섞이는 풍경도 모두 저를 멈춰 서게 해요. 여행은 낯선 감각에 나를 내던지는 경험인가 봐요.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과 낯선 나. 여독이 쌓인 후 남아있는 건, 희미해지고 있는 감각과 추억과 조금이나마 자라난 나일 거예요.
저요? 성장했냐고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잘은 모르겠네요. 여행이 끝난 뒤 찾아오는 미열과 근육통이 사라지면, 그때 여행의 짐을 풀듯 마음속 기념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사색에 잠길 예정이에요. 말이 조금 길어졌네요. 그래서 당신은 잘 지내고 계셨나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다시 한번 오랜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