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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는 존재

by 이육공

약을 먹지 않은 밤이면 지나치게 많은 꿈을 꾼다. 쫓기는 꿈, 업무와 관련한 꿈, 신경 쓰이는 약속, 그리고 어린 시절과 관련한 꿈이 베스트 상영작이다. 대장 내시경 때문에 약을 못 먹고 잔 날 엄마와 관련한 꿈을 꿨다. 엄마는 다마고치 안에 들어 있었다. 하트가 5개 차야지만 말을 하는 도트로 된 엄마. 나의 생명력을 한 시간 동안 먹이면 반 개의 하트가 찼다. 내가 10시간의 생명을 부어야지만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엄마. 하트가 조금만 부족해도 화를 내는 엄마. 끝없이 나의 생명을 부어 다마고치 속 엄마의 배를 채웠다. 하트가 줄어드는 속도에 비해 들어가는 생명력이 너무 많아 가성비가 떨어지는 다마고치였다.


그림 치료를 할 때 아이들에게 가족을 그리라고 한다. 가족을 상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나는 다복이(고양이)와 여동생만 떠오른다. 여기에 두 살이 되어가는 둥절이(고양이)까지 포함하면 업데이트 완료다. 엄마는 가족이라기보다 그냥 엄마. 내 인생의 고유명사인 엄마. 아빠는 글쎄. 아빠에게 나는 애증의 대상이다. 애보다는 증이 훨씬 더 큰, 자기 인생의 걸림돌 정도. 나에게 아빠도 비슷하다. 내 인생에 박힌 돌이랄까. 서로 인생의 방해꾼이었고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존재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솔직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엄마는 확실히 나를 사랑한다. 사랑의 방법이 꽤 기형적이라 할지라도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사랑한다. 어른이 된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한다. 나 또한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은 이해심과 인내로 발현한다. 사실은 엄마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보다 일찍 철이 들어 그만 이해해 버린 거지. 지금의 엄마는 과거의 엄마보다 많이 유해졌다. 엄마가 변한 것인지, 더 이상 엄마가 내게 원할 게 없어서인지는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보호자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이 무한하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모성애와 부성애 모두 생득적이지 않다. 기질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 나부랭이다. 설령 그 감정이 깊더라도 그 방식까지 이상적일 순 없다. 결국 모든 관계의 문제는 서로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이 다르단 점에서 기인한다. 때리고 소리치고 욕하고 윽박지르고 방치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뒤틀린 간극이 참 아프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유 없이 내가 싫다고 했던 아빠는 이제 와서 '네가 그나마 제일 낫다'라는 말을 뱉는다. 내가 당신을 남으로 생각하고 나이 든 모르는 아저씨 대하듯 잠깐잠깐 비위를 맞추는 게 오히려 맘에 차나 보다. 사실은 사랑하려는 노력을 폐기한 건데. 그래서인지 아빠는 다마고치로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마고치 엄마는 어린 나의 생명을 잘도 받아먹었다.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소리치고, 그것밖에 못주냐고 화를 냈다. 시시때때로 액정을 확인하며 하트가 꽉 차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내 모습이 너무 앳되어 보였다. 서른이 넘은 지금은 꽤 반대인 것도 같다. 엄마가 주는 것만 받아먹고 별로 하는 게 없다. 이제 엄마를 웃게 하려고 종이를 접지도 않고, 눈치를 보며 사랑한다는 편지를 전하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좋은 성적을 받아서 칭찬받으려 하지도 않고, 뭐라도 지저귀지 않는다. 엄마의 화를 풀어주려고 노래를 연습했던 어린이는 이젠 그냥 코노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악 지르는 어른이 되었다.


엄마를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를 이해한다. 내가 원해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를 용서하진 않을 거다. 사과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 그건 어린 나에 대한 기만이니까 할 수 없다. 딸이 대체 뭔지, 왜 자꾸 엄마를 이해하려 드는지 그게 참 야속하다. 어른이 된 나는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어린 딸이었던 나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냥 안쓰러울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불행한 딸들을 보듬을 건 스스로밖에 없을 텐데 그 일이 쉽지는 않다.


한 학생이 그랬다. "나보다 우리 엄마가 어리니까, 제가 다가가려고 노력할 거예요. 엄마를 위해 살아야죠"라고. 왜 불행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그 작은 몸으로 부모를 보듬으려 할까? 모든 아이들이 늦게 철들길 바란다. 어른다운 어른과 함께하고, 마음껏 응석 부리다 건전한 사랑을 나누는 어른이 되거라. 그럴 수 없었다면 가족의 상처보다 본인의 상처를 더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였으면 한다. 너를 보듬을 존재는 너뿐이니까, 상처투성이 어른으로 끝내지 말고 흉터가 남은 자리를 쓰다듬는 어른이 되거라.


지금은 나름대로 행복하지만 너무도 불행했던 어린아이를 품고 사는 어른은 오늘도 노력 중이다. 그 아이가 예쁜 흉으로 남을 때까지 어르고 달래는 일이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겠지. 너무 우울한 글이 된 것 같지만 사실은 희망으로 채운 글이니, 읽는 이도 희망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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