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삼재엔 산타도 울 걸?

그래도 행운과 불행은 번갈아 오더라

by 이육공

최근에 화물차와 사고가 났다. 무속신앙과 사주를 믿는 건 아니지만 사고 이후 엄마에게 전화하자 '야 너 삼재인데 화물차랑 사고 나서 그 정도 다친 거면 아주 다행이다'라고 했다. 일이 휘몰아치는 연말에 사고가 나버려 맘 놓고 오래 입원할 수도 없었다. 제설이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길로 출근을 하다보니 갑자기 세상이 좀 원망스러워졌다. 산타가 주는 선물을 받고싶으면 울면 안 된다고도 하고, 산타는 없으니 울어도 괜찮다고도 하는데, 뭐가 됐든 이런 상황이면 산타도 찔찔 짤 거다. 나는 자본주의에 찌든 어른이라 찔찔 짜지 않았다. 그냥 '노 모어 퍼킹 스노우'를 마음속으로 오천 번 되뇌었을 뿐. 이와 중에도 눈이 펑펑 온다.


재미있게도, 입원한 동안 두 가지 호재가 있었다. 하나는 좋아하는 유튜버에게 포켓몬을 몇 마리 받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같은 채널에서 진행했던 굿즈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포켓몬을 받은 게 왜 좋은 일이냐면 나의 5000가지 취미 중 하나가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정도면 행운의 인간 아닐까? 나의 능력을 수치로 환산하면 대충 100점 만점에 15점 정도의 운을 가졌기에, 이건 나에게 꽤 큰 행운이다. 다른 능력치와 취미도 밝히고 싶지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말을 아끼는 게 낫다.


어제 내 동생은 월드컵 결선 결과를 정확히 맞히고 심지어 누가 언제 골을 넣을지도 맞혔지만 스포츠 토토는 하지 않았다. 행운이라 하기도 뭐한 소소한 운, 그런 것들이 삶의 윤활유가 된다. 단순히 상황만을 따지면 1년 365일 중 365일 동안 불행하기 쉽지 않다. 365일 매일 운이 좋은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1년은 비유적 표현일 뿐, 일평생을 통틀어 하루도 빠짐없이 불행할 수 있는가를 따지면 그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확단할 수 없기에 애매한 서술어를 사용했다. 물론 불행은 일(日) 수로 따지는 게 아니고 감정의 체급과 회복 탄력성으로 따지는 것이다.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정도를 가늠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삶이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어른들은 자꾸 나의 불행을 우습게 여길까? 내가 작아서 무거운 짐을 못 드는 것처럼, 사람마다 짊어질 수 있는 불행의 무게는 전부 다른 걸 텐데.'라는 생각. 철이 일찍 든 어린아이는 꽤나 애달픈 존재이나,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나는 불행 중독자마냥 살았다. 불행을 불행인 줄도 모르면서 괜찮다는 말을 되뇌고 오히려 불행이야말로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나를 성장시켜주리라 믿었다. 곧 죽어도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길 바라는, 그런데 직접 말할 용기는 없으니 언젠가는 글로 나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그런 망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냥 바보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긴 그런 때였다.


열아홉에 읽은 책에서 '인간은 모두 똑같다. 자신이 지독하게 불행하며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자신을 특별히 여기는 오만일 수 있다'라는 내용을 보았다.(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그때부터 나는 오만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누군가를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부러워했다. 한 번은 과방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푸념처럼 "난 사랑받고 자란 태가 나는, 밝고 행복해 보이는 애가 참 부럽고 좋아 보이더라"라고 했더니 한 친구가 "그게 언니잖아?"라고 반문하였다. 아마 한 마디로(물론 두 마디였지만) 인생이 바뀐다는 게 그런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눈에는 나 또한 그늘 한 점 없이 행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 말이 나의 무지와 오만을 알려주는 계시 같았다. 그 애는 모를 거다.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와 깨달음을 주었는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한 바탕 웃고 울고 소리치고 싶던 심경을 그 애는 추호도 알 리가 없다.


타인의 생을 함부로 가늠할 수 없고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구구절절 너무 길게 이야기했다. 사실 인간의 뇌는 긍정적인 감정을 좇는 게 아니라 익숙한 감정을 좇는다. 불행에 익숙한 뇌는 불행을 더욱 선호하게 될 것이고, 행복에 익숙한 뇌는 관성에 의해 불행을 금방 떨쳐낼 거다. 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울과 슬픔도 사랑한다. 비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은 비를 맞는 느낌을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나 매일을 비바람 속에 있다보면 그게 비인 줄도 모르는 날이 올 지 모른다. 햇살도 뇌우도 가랑비도 산들바람도, 그 모든 느낌과 깊이를 알기 위해 행과 불행은 늘 함께 부유한다는 걸 주문처럼 외운다.

keyword
이전 06화영역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