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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나리

삶에는 이유가 없다

by 이육공

꿈에 젖은 성냥이 말을 걸었다.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불을 붙여 달라고 했다. '젖은 성냥을 말리면 불이 붙던가?'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하였다. '왜? 불이 붙으면 너는 사라져 버릴 텐데?'라고 물어보았다. 성냥이 '나는 불붙기 위해 태어났는걸.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야'하며 웃어 보였다. 도대체 성냥이 어떻게 웃을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웃고 있는 듯하였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건 그냥 하나의 쓸모에 불과하잖아. 그건 이유가 아니야.'라고 반박할 때에도 성냥은 그저 햇볕에 조용히 몸을 말렸다.


꿈 속의 젖은 성냥은, 그냥 그런 삶을 완성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면 그게 틀린 답은 아니지. 하지만 여전히 그게 삶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때때로 상상 속의 성냥까지도) 종종 삶의 목표와 이유를 혼동한다. 아직 목표를 정하지 못한 사람까지 존재 이유에 대한 끝없는 회의 속에 붙들려 있다. 우리는 마냥 낙오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쫓겨 물음표에 잠겨 있다. 삶에 이유랄 게 없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이유 없이 내동댕이 쳐진 거다.


누군가 스님에게 삶의 이유를 물었다. 스님은 삶에 이유는 없으며, 그걸 생각하면 사람은 곧잘 우울해진다고 답하였다. 불교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러하다. 내가 태어난 데에 이유가 어디 있을까? 관계에 의해 착상이 일어났고 태내에서 기본 형상을 갖추어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게 탄생의 전부이다. '내가 낳아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라는 진부한 대사는 굉장히 철학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없듯, 존재 이유라는 건 허상이다. 그렇게나 똑똑했던 실존주의자마저 실재하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의 생과 몸은 그냥 세상에 내던져졌고, 그냥 살아가는 거다. 그냥.


본질적인 존재의 이유는 없어도, 스스로 이유를 만드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상상 속의 젖은 성냥처럼 삶의 이유를 선택하여 따스한 볕에 몸을 맡기는 삶도 꽤 괜찮은 울림을 선사한다. 선택을 못하겠으면? 말지 뭐. 이유 없이 태어난 삶인데 굳이 이유를 따져야 하나. 죄책감도, 조급함도 느낄 필요가 없다. 세상이 전부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도, 여 보라지? 사실 걔들도 아는 건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생이라면, 방향키는 '어떻게'에 달려있다. 이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럼 어떻게 굴러 갈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래서 대충 어찌어찌 구르다가, 이 방법이 아닌 듯하면 또 다른 '어떻게'를 궁리하고, 그러다 그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그때 또 또 다른 '어떻게'를 찾는 것, 그게 삶이자 생이자 일상이다.


그러므로 살아야 함은 알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내가 오늘도 취한 사람처럼 휘청휘청 생을 영위하는 중이다. 갈 지(之) 자로 휘적휘적 다니면 대충 온 방향을 다 둘러보지 않을까? 그렇게 지나온 길이 휘영청 밝은 듯도 하다. 오늘도 갈피 잡지 않은 채 여러 가지 잡다한 상상을 한다. 젖은 성냥보다 더 많은 꿈에 젖어 희나리로 살아가는 것도 낭만적이다. 어쩌면 내일의 꿈에는 다 마른 성냥이 만든 작은 불꽃 앞에서 온기를 나눠 받을지도 모르겠다. 상상만으로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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