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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않은 것들이 싫어

다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by 이육공

<오늘의 bgm: 불안한yee-상냥함은>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방식대로 사랑을 준다고 한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내게 다정하지 않은 것들이 싫어서 스스로 다정하게 굴곤 한다. 상호 호혜성의 원칙에 따라 그 다정함이 내게도 돌아오리라 믿는다. 덕분인지 세상이 종종 내게 무정할지라도, 사람만큼은 내게 자주 다정히 군다. (목적 있는 다정함이 무슨 다정함이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건 내세에서 칸트와 만나 직접 해결토록 하겠다.)

정작 고민해야 할 내용은 따로 있다. 이런 식으로 다정하려 하는 게 괜찮은가? 이런 삶의 방식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스스로를 조금씩 깎아서 내어주는 것이 다정함이라고 한다. 나를 깎아서 내어준 만큼 타인도 나에게 자신을 내어주면 해결될 거다. 문제는 서로의 측량 기준이 꽤나 다르다는 점과 모두가 내게 다정히 구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아주 편협하고 주관적인 인생 연구에 따르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너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야'라는 대사를 뜬금없이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이다. 보통의 다정함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루어지는데, 저 대사에는 '그런데 나는 안 그렇거든'이 생략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깎아 노력하여 다정한 것인데, 너는 내게 다정하지 않으면서 나의 천성이 다정하다고 생각하네'라는 말은 차마 뱉지 못한다. 그냥 푸스스 웃으며 넘길 뿐이지. 언젠가는 이 사람이 내게 다정하리라고 믿었지만 결코 그가 나를, 내가 만족할만큼 사랑할 일은 없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는다. 이때 상처받는 건 나이고, 미래에 후회를 뱉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상냥하다. 그게 나를 아프게 했다. 냉정은 상냥함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다정은 그저 냉정의 반의어일 뿐이다. 그 누구도 냉정하면서 다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다정하지 않을 거라면 상냥하지나 말지. 사람 헷갈리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부적으로 다정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냉정하지도 않다. 우리는 미적지근한 다정(혹은 미적지근한 냉정)을 택하든지, 아니면 좀 더 따뜻하게 살든지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어차피 완전히 다정할 수는 없다. 자기희생을 취미로 삼는 건 금물이다.


내게 다정은 이미 습이 되어 자리 잡았다. 다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과 연결된다. 결국 사람은 선하리라는 믿음으로 나를 떼어 타인에게 건네는 일, 그렇게 이타적으로 살아가리라 끊임없이 결심하는 일. 어쩌면 다정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을지언정 끝까지 선함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롭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강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다정을 다짐한다. 이게 맞는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근사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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