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 5일차 (2)
우리 가족은 늘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성대한 식사를 한다. 나도 시부야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강력하게 즐기고 싶었다. 나 같은 마천루 야경 덕후에게는 고층 빌딩에서 비싼 식사를 하는 게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예산 및 의견 차이로 나 혼자 식사하기로 했다.
계속 뇌를 빼고 애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다니다가, 갑자기 타임 스퀘어보다 유동 인구가 많은 시부야역에 내던져지니 마치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떠올랐다(진짜임). 처음에는 인파에 휩쓸려 이리 저리 다녔는데,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라도 야경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글에 몇 개 찾아보던 도중
https://livejapan.com/ko/in-tokyo/in-pref-tokyo/in-shibuya/article-a0004236/
링크를 발견했다. 맨 위의 시부야 스카이는 예약 잘못해서 못 갔고, 두 번째 시부야 히카리에와 세 번째 시부 니와를 가기로 했다. 스크램블 스퀘어 풍경 감상용 전망대다 보니, 시부야역 바로 옆 건물에 있었다. 그러나 시부야가 지상 인도가 별로 없고 지하로 많이 다니길래 구글 지도의 방향대로 움직여도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부야 히카리에에 도착했다.
가니까 외국인 가족분들이 유리 틈 사이로 사진을 찍고 계셨다. 예쁘긴 했는데, 사거리 교차로가 잘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다. 또한 백화점 내라 그런가 조명이 계속 섞여서 사진으로 담기 힘들었다. 실물로 보면 좀 더 예쁘다.
시부야 히카리에 백화점에서 전망이 보이는 고급 라운지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뷰도 그닥인데다 애초에 라운지가 없었다!
그래서 링크 세 번째에 있는 시부 니와로 향했다. 여기에서도 좀 헤맸는데, 전망대가 있다고 했는데 경비원분에게 물어봤는데 닫혀 있어서 자기도 잘 모른다고 한다. 세계적인 음식점 CE LA VI가 위치해 있다고 해서 여기서 식사를 해보려 했는데, 뭔가 입장하기 위한 진입 장벽이 좀 심했다. 근데 이 건물 제일 꼭대기 두 층을 돌아다녀 봤는데 전망대가 딱히 없던데? 여기서 식사를 하면 야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갔다. 원래는 여기에서 야경을 어떻게 보는 건지 프론트분에게 질문하던 놈이 갑자기 여기서 코스 요리로 혼자 식사를 하겠다니, 태세 전환이 상당하다 나.
뷰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교차로가 바로 정면으로 보이고, 스크램블 스퀘어가 좌측에 있는 좌석으로 안내해 주셨다. 다만 내 영어 스피킹 실력이 완전 죽었다는 것에서 충격을 좀 받았다. 한 4년 정도 안 쓰다 보니까 머릿속으로는 문장이 완성되는데 내뱉어지지가 않았다.. 아마 처음 와보는 초고급 식당이라 긴장해서 그럴 수도. 날씨가 쌀쌀했는데, 고층이라 그런가 칼바람이 무지 불었다. 내 양옆으로 불을 피워주셨는데, 거의 열 번 가량 꺼져서 직원분도 포기! 를 하셨다. 진짜 추웠다.
1만 엔 정도 쓸 각오를 하고 있어서 여기 레스토랑의 시그니쳐 메뉴라는 5코스 요리를 시켰다. 동양과 서양의 명품 음식들이 퓨전된 코스라고 한다.
*주인장은 음식에 조예가 없어서 묘사가 빈약해도 이해를 부탁*
처음 먹은 red sea bream crudo(홍해 감성돔 스페인식 회)는 일본하면 떠오르는 싱싱한 회라 봐도 무방했다. 싱싱하면서도 쫀득한 돔의 식감이 에피타이저로 일품이었다. 라임과 허브, 고수로 신선한 느낌을 잘 냈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와사비인 Horseradish 로 초밥 맛을 실험적으로 냈다고 하는데 성공한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먹은 roasted tomato potage(구운 토마토 스프)는 토마토 소스와 fregula(프레굴라 면)가 잘 어우러졌다. 쉽게 질릴 법한 토마토의 맛을 리코타 치즈로 한층 더 메인 디쉬를 기대하게 만든다. 느끼한 맛을 바질로 마무리한다.
foie gras "dan dan" noodles(푸아그라 탄탄면)는 진짜 맛있었다. 고소한데 전혀 느끼하지가 않았다. 정말 맛있게 고소한 탄탄면이었다. 푸아그라인지 모르고 먹었는데, 정말 맛있다. 고소한 고기와 땅콩, 유자 제스트, 다 고소하지만 비율에서 미스가 나면 느끼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고소한 맛끼리 조화를 이루는 것을 직접 먹어봐야 한다.
grilled hanger steak & baked bread(구운 토시살 스테이크)는 메인 메뉴였다. 메인 메뉴답게 정말 맛있었다. 캄보디안 스타일의 볶음밥에 커팅되어 나온 스테이크 조각을 먹고, 마무리로 적당량 자른 파인애플로 입가심을 하면 된다. 스테이크가 아주 부드러웠고, 직전에 먹은 탄탄면의 고소한 맛이 남아 있어서 달고 고소했다. 파인애플도 스테이크에 알맞게 잘 그릴되었다. 볶음밥은 조금 따로 노는 것 같았는데, 후반부에 가서 밸런싱을 맞춰주기 위함이었다.
후식으로 white chocolate mousse(화이트 초콜릿 무스)를 먹었다. 흰자 무스랑 딸기 젤라또 아이스크림 둘 다 단맛이 강한데, 오히려 서로 보완적인 관계였다. 같이 놓인 딸기도 달달하게 맛있었다. 다만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든 면 같은 Pate Kadaif(지중해와 동아시아의 디저트로 유명하다고 한다)는 솔직히 바삭하기만 하고 화이트 초콜릿 맛이 잘 느껴지지는 않았다. 처음에 젤라또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다 먹어버려서 그런가?
special selected tea로 적절하게 마무리되는 맛이었다. 앞선 음식들이 묻히지 않는 선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을 냈는데, 무슨 티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날씨가 추워서 제공받은 담요로 무릎을 감싸고(담요단체험) 벌벌 떨면서 유리창 바로 건너 있는 시부야의 야경을 마주하며 Tokyo Flash 를 1시간 반복 재생해두고 반색을 겸한 여유를 즐겼다. 참 분주하더라. 결제도 알아서 카운터분이 내 자리로 오셨다. 1만엔 조금 더 나오겠지 싶었는데, 1천 엔 이상 쓰면 바깥 자리로 안내해주신다고 하길래 난 당연히 음식을 그 정도 시키면 바깥 자리로 배정받을 수 있는줄(당연히 그럴 일이 없다) 알았다.. 그리고 물 두개 중에 선택하라고 하길래 미네랄 워터로 골랐는데 이것도 1300엔을 내더라? 그래서 거의 15000엔 가까이 냈다. 한 명 식사하는데 15만원을 태우다니.. 그치만 정말 만족스러웠다. 너무 추운 날씨를 빼면, 시부야 교차로가 보이는 건물 옥상 야외에서 코스 요리를 즐기며 바라보는 야경이란 참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나서 다른 곳을 더 둘러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1.5배 더 지출한 데다가 1시간 동안 벌벌 떨어서 몸이 너무 숙소를 가고 싶어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시부야 근처를 더 둘러보면 좋았을 것 같다만, 혼자서 시부야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즐기고 온 것만으로도 기가 많이 빨려서 후다닥 숙소로 돌아갔다.
야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최적의 높이였다. 전반적인 시부야가 조망되면서도 단일한 자동차와 사람들 하나의 움직임에도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시야.
그 후 내 동생이 그토록 원하는 일본 화장품을 5만원 치를 사들고 돈키호테에서 먹거리를 5만원치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6일차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어야 해서 볼거리는 크게 없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도쿄와 서울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행세계의 서울에 온 느낌이었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높지 않게 붙어 있는데, 건축 양식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건물들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 자유를 공존으로 여기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묻어 있었달까. 그치만 자세히 보면 또 건물마다 개성이 넘치고, 빌딩마다 개성이 넘친다. 한국의 공간은 빠른 성장의 기반을 밑바탕으로 전쟁 후 순식간에 솟아오른 나무 같다면, 일본은 예전부터 조금씩 타인과 함께 상생해 온 풀꽃들의 집합체 같았다.
사람들은 정말 사과를 자주 한다. 그리고 훨씬 나이가 어린 우리들에게도 노인분들이 고개 숙여 인사한다. 전망대를 가면 외국인 손님들에게 엘리베이터가 닫히며 90도로 인사를 하는 여직원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자주 갈 법한 식당에 가면 카운터, 조리하시는 분들을 포함해 모든 점원들이 우렁차게 인사를 하신다. 돈까스집에서는 내가 밥을 다 비우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직원분이 곧바로 오셔서 새 공기를 담아주셨다. 일본은 타인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타인을 위해 행하는 나라인 것 같다. 어떻게든 상대방 앞에서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한국과는 좀 대조적인 분위기 같다. 다만 내가 이렇게 해주는 만큼 상대방 또한 나처럼 이렇게 해줘야 하는 기대가 상당히 높아 보인다. 어떻게 보면 편하고, 어떻게 보면 억눌린 분위기의 사회이다.
아직도 현금을 써서 동전지갑이 필요한 바뀌지 않는 나라,
그렇지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려놓은 듯해서 눈이 즐거운, 그래서 가능성의 이름이 담긴
그러한 나라가 일본이고, 그러한 도시가 도쿄 아닐까.
견문이 넓어지는 경험을 해서 참 즐거웠다.
도쿄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