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반. 알람에 맞춰 눈을 뜬다. 아직 사위가 어두워 일어나는 일이 여름보다 힘겹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고장 난 코를 훌쩍이며 아이들이 잠든 방으로 간다. 아이들이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 후, 방문을 닫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다. 선반 위 약상자를 식탁에 내려놓고, 아침에 먹어야 할 영양제를 손 위에 올려놓는다. 한 입에 털어 넣기엔 많은 양의 영양제를 물과 함께 삼킨다. 아내가 일어나 아이들 아침 준비를 시작하면세수도 안 한 채 동네 헬스장으로 간다. 출근 전 40분 동안 가벼운 근력운동과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느 아이 키우는 집 모습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부분도 있다. '동네 헬스장으로 간다'가 그렇다. 애 아빠가 근력 운동 시작했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만, 적어도 포기했던 일을 다시 시작한 내겐 커다란 기쁨이었다. 작년부터 러닝을 하며 생긴 몸 상태에 대한 확신이 다시 헬스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많이 망가진 몸이라 생각했는데 가벼운 운동은 버틸 정도가 됐다. 여러 핑계로 몇 년간 가지 못했던 헬스장에 다시 다닐 수 있게 되니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되찾은 기분이다.
먹는 영양제도 늘어났다. 예전엔 관심도 없던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있다. 주변 추천으로 이것저것 샀더니 양이 많아졌다. 내 몸에 들어간 것들의 효능은 몰라도 비타민 A부터 Z까지는 다 들어있는 것 같으니 대충 안심이 된다. 괜찮다. 이젠 건강하게 오래 살 일만 남은 것이다.
가을은 예정보다 늦게 찾아왔다. 늦은 미안함 때문인지 나무들도 뒤늦게 법석이다. 밤새 주차해 둔 차 위로 노랗고 빨간 잎사귀를 살포시 올려두곤 애교도 떤다. 귀엽긴 하다만 아침부터 치우려니 번거롭다. 내 속 어딘가도 후드득 떨어진 듯 해 괜히 낙엽을 보며 투덜댔다.
며칠 전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침에 부고를 듣곤 많이 놀랐다. 친구가 걱정됐으나 당장 빈소로 갈 수 없었다. 퇴근 후 장례식장을 찾았다. 가는 길에 후배에게 연락해 친구 상태는 어떤지 물어봤다. 괜찮아 보인다는 말에 적이 안심했으나, 도착 후 마주한 녀석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아버질 잃은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끌어안고 같이 울어줬지만 부족했다.
빈소는 작았다. 몇 안 되는 좌식 테이블엔 교수님과 동문들이 앉아 있었다. 인사 후 근황을 나눴다. 떠들썩한 사람들 속에서 궁금하지 않은 문답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날의 마지막까지 자릴 지키다 일어났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고, 유가족은 쉬어야 했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딸의 결혼식을 그려보았다.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은 내 딸이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올 것 같아 울적했다. 버진로드 앞에서 딸 손을 잡은 내가 먼저 울 것만 같아 조금 웃음도 나왔다. 부쩍 아이들과 내 나이 차가 걱정된다. 그때의 난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딸 눈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였으면 한다. 무상한 세상에 부질없는 욕심이지만 꼭 그랬으면 한다. 건강해야겠다. 유독하루가 버거운 날, 아빠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다짐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