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독후감, 영화 베를린과 소설 페스트
곧 영화 '휴민트'가 개봉한다. 휴민트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해외에서 펼쳐지는 국정원 요원과 북한 요원의 대결'이라는 소재로 '베를린'과 '모가디슈'를 연출한 바 있다. 두 영화 모두 엄청 재미있게 봐서 이번 영화도 기대가 된다.
영화 '베를린'에서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배우)와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 배우)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영화 내내 발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닌 그들은 영화 후반부에 최종 보스를 해치우러 떠난다. 정진수는 북한 최고 엘리트 표종성을 한국으로 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표종성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최종 보스의 아지트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입장을 한 번 살펴보자
정진수는 국정원 블랙 요원이자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다. 후배에게 승진이 밀렸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베를린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권력자의 음모'를 발견하고 국정원에 보고하지만, 외교적 리스크를 우려한 회사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무장한 소대 병력을 앞에 두고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표종성은 북한의 요원이다. 충성했던 국가에 버림을 받았다. 복종했던 상관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표종성을 죽이려 한다. 작전에 성공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 그의 아내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표종성에게 크게 실망했다. 구출을 하더라도 남편과 함께 귀화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작전에 성공하더라도 아내는 자기를 떠날 것 같고, 자신의 고향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둘은 절망적인 상황에 쳐해 있다. 하지만 암담한 생각에 갇혀서 희박한 확률을 계산하기보다는 덤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 작전 시간은 새벽 네시. 인간이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라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적의 아지트 인근에 매복한 그들은 작전시간을 기다린다. 센티한 새벽에 나눈 둘의 대화를 엿들어보자.
정진수 : (너랑 같이) 전향할지도 모르고 안 할지도 모르는 마누라 때문에 네 목숨까지 건다고? 네가 나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냐
표종성 : 난 당신이 목숨을 건 이유가 더 이해가 안 되오
정진수 : 내 일이니까. 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 그냥 하는 거지
표종성 : 내 아내요. 나도 내 아내를 구하는 데 이유는 없소
둘은 절망적인 상황에 타협하지 않고 저항한다. 이것저것 따지며 저항하는 이유를 구하지 않고 저항한다.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소설 '페스트'를 통해 저항을 말한다.
소설의 배경은 알제리의 평화로운 해안 도시 오랑이다. 어느 날 오랑에 페스트가 찾아왔고 도시는 폐쇄됐다. 사람들은 도시 밖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일상은 파괴됐고 사람들이 죽었다. 공무원들이 발표하는 사망자의 통계치는 점점 우상향 했다. 사람들은 시체를 치워야 했다.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되어 시체 나르는 기차의 소리를 들었다. 도시에 절망이 찾아왔다.
이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한 인물들이 있다.
최현우 씨(소설 속 원래 이름 리외)는 의사다. 아픈 아내를 도시 밖 요양소에 보낸 후 페스트가 찾아왔다. 아내와는 당연히 만날 수 없다. 의사로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을 당연한 소명으로 여긴다. 도시가 페스트에 잠식된 상황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페스트 또한 자신이 치료해야 할 병으로 생각하며 일을 한다. 사망자 수치가 계속 올라가는 재앙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 생각이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박세호 씨(소설 속 이름 타루)는 얼마 전 오랑에 정착한 외지인이다. 타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오랑에 찾아온 재앙에 맞선다. 전염병의 거침없는 확산으로 행정력이 부족해지자 자원 보건대를 조직하여 사람들을 모았다.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여 저항했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시민들은 힘을 합쳤고 자원 보건대는 페스트 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철수 씨(소설 속 이름 그랑)는 오랑시의 계약직 공무원이자 소시민이다. 그는 최현우 씨나 박세호 씨처럼 페스트 퇴치에 있어서 화려한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다. 그냥 자원 보건대에 참여하라길래 기꺼이 참여했을 뿐이다. 그가 보건대에서 맡은 역할은 통계 장부 작성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해 낸다.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김철수 씨 중에 한 명으로 활동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재앙은 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끝났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절망(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고 말한다. 당연히 예정된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고. 인간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포기하지 않고 해내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우리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오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을까? 혹시 작은 절망에 패배하지는 않았을까? 오늘 하루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않고 먼 미래만 바라보다 비관에 빠지진 않았을까?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진 않는가? 내 삶을 소중히 대하고 있을까? 나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그렇듯 인간은 우리 생각보다 강한 존재다.
한국의 경우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압도적 꼴찌고 자살률은 압도적 1등이다. 개인의 행복이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각자의 절망이 있을 것이고 또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동의 절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담담하게 해 나가고, 때론 사람들의 힘을 모으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
절망에 익숙해지는 것이 절망 그 자체보다 최악이라고 간주했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책소개]
'이방인'에 이어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시리즈 2탄이다. 이방인이 부조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면, 페스트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소설이다. 위에서 소개한 등장인물 말고도 아내를 만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는 외지인 기자 랑베르, 페스트를 추상적으로 대하는 신부 파늘루, 재앙을 기회로 삼는 코타르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단순 '저항'만을 말하지 않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다양한 방법과 관점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