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길상사, 팔각정, 석파정
어제저녁, 와이프한테 어디 가자고만했다. 가을이고 바람도 쐴 겸.
멀지 않고, 길도 덜 막히고, 경치도 좋아 머리도 비울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지도를 봤다. 길상사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들어본 곳. 서울 시내라 더 좋고.
일단 그리로 출발. 일요일 아침, 차도 시원하게 달렸다. 내부순환도로를 내려서 거의 다 왔는데.. 꼬불 꼬불한 길에 차선을 잘못 잡아 다시 내부순환도로로 올라타는 해프닝 한번.
성북동 여러 나라 대사관을 지나 길상사 주차장, 10시 전에 와서 아슬아슬하게 빈자리 안착.
도심에 이런 절이,,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넘겨짚었다. 절 한쪽에 법정스님 유골이 모셔져 있었다. 그 옆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대원각, 최고급 요정이었다고. 법정 스님 "무소유"를 읽고 주인이 무주상보시 했다고 한다. 무료로 기증했다 이런 뜻 같다. 역사적 유적을 개인이 사서 뮤지엄이나 개인 별장, 상업용으로 쓰는 건 봤는데, 유흥시설이 종교시설로 변했다. 참 귀한 경우다. 덕분에 주택가에 이런 멋있는 자연을 즐길 수 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 거네. 나도 공양했다. 딱히 종교까지는 아니어도 좀은 나누고 살리라. 나와 가족 안위를 청탁하는 데 빈말로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음 코스는 팔각정. 북악산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로 오르는 분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팔각정에 도착. 주차장도 잘 되어 있다. 평창동 일대가 한눈에, 남쪽은 오늘 좀 뿌옇게.. 남산과 종각이 보였다. 저기 옆으론 한성 도성도 보였다. 아.. 여기가 도성의 북쪽 끝자락이구나. 종로구고. 맑은 날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겠다. 길상사 보다 격이 좀 많이 떨어지는 팔각정은 좀 그랬다. 다음에는 차 말고 트레킹으로 올라와야겠다. 북악산 가을을 만끽하려고.
또 서행으로 운전해 부암동으로.. 아침을 조금만 먹어서 배는 서서히 고파오는데.. 갈려는 식당은 11:20에 문을 연다. 차라도 한잔 할까. 점찍은 카페로. 오르막 길 한쪽엔 주차구역. 깔끔한 골목길 따라 카페들이 한둘 나타났다. 나름대로 제 멋을 부렸다. 배가 좀 더 고팠다. 애매한 시간이라 식당으로 고고싱. 또 한 번 차를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시행착오. 낑낑 돌리는 데 성공.. 급 경사길을 피해, 10 미터 일방통행길 역주행 성공. 아찔 짜릿.
하림각. 유명한 차이니즈 레스토랑. 일단 크기가 압도했다. 아직 주차창이 텅. 입구 바로 옆은 비우고 그 옆에 세웠다. 너무 커 썰렁했다. 1번 도착이라 들어가기가 좀 주저주저.. 인공 폭포 앞 흔들의자에 잠깐 시간을 보냈다. 입장. 붉은색, 황금색이 많은 진짜 중국식 레스토랑. 봉황실 두 분으로 안내받아 갔다. 중식 코스 가격이 쎄네, 단품 요리도 후들후들. 격조 높은 가장 대중적인 식사 메뉴를 주문. 오, 맛있네. 괜한 이름이 아니네. 손님들이 줄줄이 입장. 역시 대중은 똑똑하다. 평점 값 한다.
서비스 원두커피를 집어 들고 나섰다. 차는 식당에 두고 걸어서. 굳이 두겠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더 넓은 주차장이 고맙다. 한 오백 미터. 전형적인 구도심 거리를 지나 도착한 세검정. 인조반정을 결의하고 칼날을 세웠던 곳이라는 데, 그냥 정자만 하나.. 개천 한쪽 옆에 짧은 단풍길. 볼만한 건 개천에 큰 바위.. 터덜터덜 돌아섰다. 오면서 봐던 석파랑으로..
석파랑. 구글맵에선 여기가 흥선대원군 별채라고 봤는데.. 돌사진 야외 촬영 중이었다. 잘 다듬은 작은 마당 있는 한식당이었다. 거기 소똥구리가 중세 성벽 저격용 대포알 만한 소똥을 굴리는 조각도 있다. 와이프한테 이야기했다. 저 소똥구리가 나 같다고. 나만 죽어라 굴러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 있다며 사실상 외벌이 위세를 좀 떨었다. 말없음이 잠시. 와이프 왈 거기엔 할 말 없음, 멘트가 따라 나왔다. 분위가 죽지 않았다. 살았다. 가끔 도발이 성공할 때가 있다. 한옥 위쪽으로 석조 건물 레스토랑, 그 아래 평점 괜찮은 빵집. 내가 좋아하는 밤식빵이 메인이라니 안 살 수가 있나. 진짜 속이 밤으로 가득.
다시 하림각으로 돌아와 차에 빵을 두었다. 그만 이제 돌아갈까 하다, 석파정에 마저 가는 걸로. 사실 1시쯤이라 집에 가도 딱히 할 일도 없고. 잘못하단 쓰레기 버리기에 동원될 수도 있으니.
석파정 미술관. 그냥 석파정만 보고 싶은데.. 미술관을 지나 언덕길을 조금 돌아가니 정원과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지. 저 한옥이 흥선대원군 별채겠네. 발길을 잡는데, 위쪽에서 아저씨가 돌아가라 했다. 직장생활 30년 눈치로 보건대. 여긴 입구가 아니다, 미술관 통해서 들어와라. 미술관은 유료였다. 그것도 네이버 예약을 했는지 물어봤다. 안 하고 왔고 그 핑계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좀 노곤했기에. 와이프가 여기까지 왔는 데 보고 가자 했다. 스테프에게 예약 안 하고도 가능하냐 물었다. 일단 줄 서시라고.. ㅎㅎ 성인 1인당 만 오천 원. 오늘 처음 유료입장. 예약 취소자에 맞춰 미술관은 2시부터 관람 가능하다고. 먼저 석파정 관람부터..
오늘 마실의 하이라이트는 여기였다.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빨간 단풍, 노랗게 변해가는 나뭇잎, 굽은 소나무가 어우러진 산책길, 막 다른 절벽 바위, 별채 마루에 않자 쬐는 따스한 햇살. 기와 담장 몇 겹 너머 계곡의 단풍화. 가을 단풍을 여기서 즐겼다. 젊은 스태프가 아이들에게 스탬프 투어를 상기시켰다. 그가 말하길 이곳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다 한다. 수령 600년의 소나무가 랜드마크다. 여기 주인이 여러 번 바꿨다고. 그 전 주인이 한옥 한 채를 뜯어 옮겨서 식당으로 쓰고 있다. 그게 아까 석파랑. 지금 주인이 제약회사 회장님. 즉 사유지다. 뭐.. 흥선대원군도 안동 김 씨 영의정 한테서 샀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꼼수로 뺏은 거지. 아들(고종)을 여기 하루 재우고, 황제가 잔 곳을 감히 신하가 어떻게 잘 수 있냐는.. 억지 구실이다. 안동 김 씨한테 뭔가 본 때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싶다. 석파는 흥선대원군의 호다. 어찌 되었던 종로구에서 단풍 계곡이 살아 있다니 신기하고 좋다.
2시에 미술은 지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