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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작 Mar 03. 2024

e04 캐나다 (4) - 아메리카를 구원하다

캐나다로 떨어진 김주노. 자크 카르티에와의 조우. 그리고 뜻밖의 유럽행.


김주노는 확신했다.


미션의 열쇠는 천연두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천연두로부터 해방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김주노가 있는 시기는 16세기 중반이었다. 천연두 예방법인 제너 종두법이 나오기 150년 전이었다.


김주노는 기억을 더듬었다. 역사 게임을 통해 제너 종두법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의학적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도전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천연두를 예방법을 짚고 넘어가자.


크게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인두법은 천연두 감염자의 상처를 살짝 옮겨 심어 백신을 만드는 것이고, 우두법은 소의 상처를 옮겨서 백신을 만드는 것이다.


둘 다 효과가 있기는 한데, 인두법은 말이 좋아 백신이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직접 옮기는 방법이라 일반적인 전염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우두법이 인두법보다 나았다.


우두법은 약한 천연두에 걸린 소, 즉 우두에 걸린 소의 고름을 인간에게 주입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백신 치료와 같은 원리이다. 약한 병에 걸리게 해서 강한 병에 대해 면역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고름을 주입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주사기로 주입하는 게 위생적이고 안전하겠지만, 주사기가 없다면 고름을 피부 상처에 덧대기만 해도 된다.








몇 달이 지나 카르티에는 다시 캐나다 원정을 준비했다.


소식을 들은 김주노는 카르티에를 찾아 애원했다.


"명색이 족장 아들인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귀금속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소와 말, 강아지만 100마리씩 가져갈게요.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죠? 유럽의 가축을 선물하면 우리 아빠도 기뻐하실 거예요."


카르티에는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당돌하구나. 소나 말이 얼마나 비싼데, 그걸 100마리씩이나 달라고? 가격은 둘째 치고 그 많은 가축을 데리고 항해를 떠난다고? 너무 위험해. 그걸 갖다주면 너는 뭘 줄 수 있지?"


김주노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돌덩이를 꺼냈다.


금이었다.


실제로 퀘벡주는 현재도 캐나다 금의 1/5을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금광 지역이다.


김주노는 미리 부족의 도움으로 금이 나는 곳의 위치를 파악했고, 일부는 채취까지 마친 상태였다.


김주노는 가축을 가져가면 금광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카르티에는 잠깐 고민하더니 김주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참고로 카르티에가 두 번째 캐나다 원정을 떠난 건 역사적 사실이지만, 가축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드디어 출항일이 다가왔다.


김주노는 점찍어둔 가축들을 이끌고 항구로 향했다.


건강한 소 90마리에 천연두에 걸린 소 10마리가 배에 올랐다.


때는 16세기 중반, 구체적으로는 1535년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중부에 있는 아스테카 문명은 멸망한 뒤였다.


그러나 남미의 잉카 문명은 아직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고, 아스텍 위쪽의 마야 문명이나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은 굳건한 상태였다.


지금으로 천연두를 예방한다면 유럽의 북미 점령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캐나다에 도착한 김주노.


김주노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에게 가축 키우는 법을 가르쳤다.


유럽에서 가져온 밀, 보리 종자를 이용해 농사를 짓기도 했다.


이로쿼이 부족은 소나 말을 이용해 대규모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사람들은 신문물을 선물한 김주노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우두에 걸린 소를 이용한 예방 접종도 순탄하게 진행됐다.


김주노는 족장을 찾아갔다.


"아빠, 제가 힘들게 준비한 가축과 종자는 다른 인디언 부족에게도 널리 선물하는 게 좋겠어요."


김주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로쿼이 연맹의 족장 정도라면 충분히 가축과 종자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족장은 김주노의 업적에 압도되어 있었다.


별다른 이의 없이 김주노의 요청대로 다른 부족에게도 가축과 종자를 보급하고 천연두 예방법까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밀과 보리, 옥수수 농사로 식량이 넘쳐났다.


오대호 주변은 안 그래도 비옥한 토지였는데, 수천 년간 농사를 지은 적이 없어서인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미친 듯이 작물이 자라났다.


풍족한 식량에 전염병까지 예방되어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나날이 늘어났다.


어느 날 저녁, 밀밭을 둘러보고 잠이 드는 순간, 김주노는 사타구니가 가려웠다.


뭐지? 바지 안쪽을 벅벅 긁는데, 종이 한 장이 손에 잡혔다.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김주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껏 개고생한 게 튜톨리얼이라고? 메인 시나리오는 도대체 얼마나 빡센 거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이 뒷장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정말요? 확실합니까? 24시간 뒤에 최종 의사를 묻겠습니다.'


김주노는 종이를 찢었다.


이미 원주민의 삶이 익숙해졌다. 한국에서도 자연인의 삶을 동경했는데, 굳이 빡빡한 현대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쯤에서 캐나다의 역사를 다시 보자.


지난 편에서 캐나다의 초반 역사를 했으니, 이제는 후반 역사를 소개하겠다.


19세기와 20세기 이후의 이야기다. 김주노가 없었다는 걸 전제로 한, 진짜 캐나다의 역사다.


19세기


복습하자면, 18세기 미국이 독립하면서 미국 땅과 캐나다 땅이 분리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여전히 앙숙이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가 되었고, 유럽은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 때문에 쑥대밭이 되었다.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 틈을 이용해 미국은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국력이 달려 영국 본토를 칠 수는 없었다. 영국에 속한 캐나다 지역을 침공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아무리 나폴레옹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었다.


본토에서 떨어진 지역이라 해도 신생국 미국 따위에 쉽게 패배할 나라가 아니었다.


한동안 호각세를 이루며 미국과 영국이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몰락했고, 한숨 돌린 영국은 함대를 이끌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미국은 난감했다.


예상대로 영국한테 탈탈 털렸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뉴욕 백악관까지 점령당했다.


영국은 이번 참에 미국을 싹 밀어버릴까 생각했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나폴레옹이 유배지였던 엘바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시 유럽은 전쟁터로 변했다.


영국은 미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국도 더는 영국에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 나라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로 하고 종전에 합의했다.


전쟁을 마친 미국은 부지런히 힘을 키웠다.


일단 끝없는 개척으로 땅덩어리를 늘렸다. 재테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유럽이 크고 작은 전쟁을 반복하는 동안 군수품을 팔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미국은 순식간에 강대국 반열에 이르렀다.


영국은 고민했다.


'이러다 캐나다 지역을 빼앗기겠다. 그렇다고 본토를 비우고 아메리카 대륙에 군대를 보내기는 부담스럽다. 어쩐담?'


영국은 묘수를 두었다. 캐나다에 자치권을 주고 스스로 발전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중반에 캐나다 자치령이 등장했다.


자치가 시작된 후 프랑스계 정착민을 중심으로 몇 번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별 어려움 없이 진압됐다.


20세기 이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영국은 캐나다 자치령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남자를 징병했다.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사망했다.


캐나다 자치령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니, 저 멀리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왜 우리가 피를 흘리지?'


캐나다 지역에서 독립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 협상이 시작됐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콩트 형식으로 보겠다.


영국이 승전국 지위에서 이런저런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데, 회의장 문 앞에 캐나다 자치령 대표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영국 대표가 물었다.


"어? 캐나다? 무슨 일로 오셨나? 너희는 우리와 같은 영국이니까 내가 대신 협상하면 돼."


자치령 대표가 발끈했다.


"아니, 이보쇼.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입은 피해가 얼마인데? 왜 보상은 영국이 받나? 우리도 독립국 지위에서 보상을 나눠 줘!"


장내에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캐나다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 캐나다의 입장에 동의했다.


캐나다에 독자적인 승전국 지위를 부여했고, 이때부터 영국과 캐나다는 사실상 별개의 나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캐나다는 흐지부지(?) 독립했다.


은근슬쩍 독립하더니, 있는 듯 없는 듯 지금까지 묵묵히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캐나다는 임팩트 있는 역사가 없다.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독립이 됐다. 땅덩이가 넓고 자원이 많은데,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다 보니 언젠가부터 선진국 대열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스토리다.


김주노는 메인 시나리오를 거부했다.


오랜 잠이 이어졌다.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마치 수백 년이 흐른 듯한 긴 수면이었다.


김주노는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질감이 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21세기 대한민국이 틀림없었다.


'꿈이었나?'


겨우 몸을 가누고 비틀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많은 사람이 보였다.


많은 사람. 붐비는 거리. 모르는 사람들. 익숙지 않은 풍경?


김주노는 할 말을 잃었다.


창문 밖으로 검은 머리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


'뭐지? 역사가 변한 건가?'


김주노는 황급히 집을 나서 번화가로 갔다.


상점 간판에 한글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러시아어였고, 듬성듬성 한자나 일본어가 몇 개 보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들이 모두 러시아어를 하고 있었다.


'천연두를 막고 작물을 전파한 것만으로 역사가 바뀌었구나.'


김주노는 당장 서점으로 향했다. 역사 코너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꺼냈다. 모두 생소한 러시아어로 쓰여 있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린이 서적을 보기로 했다. 글자는 포기하고 삽화를 보며 바뀐 역사를 추리했다.


일단 세계지도가 달랐다.


북아메리카는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일본도 없었고, 대한민국도 없었다. 아시아 지역 대부분은 러시아 영토로 표시되어 있었다.


김주노가 아는 대한민국은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달랐다. 한국인으로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다시 허리춤이 간질거렸다.


바지 안쪽에 손을 쑥 넣고 잡히는 걸 꺼내 들었다.


꾸깃꾸깃한 종이에 한국어가 적혀 있었다.


'자, 이제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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