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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작 Sep 04. 2024

e07 러시아(3) - 라스푸틴이 되었다



김주노는 혁명이 필요했다. 공산주의 수립에 앞서 국민이, 특히 농민이 봉기해야 했다. 


러시아는 평화로웠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도저히 혁명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주노는 배운 지식을 더듬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이유가 뭐였더라? 어떻게든 그 조건을 만들어야겠는데...'


황제의 폭정! 


김주노는 실마리를 찾았다. 아무리 풍요로운 나라라도 지도자가 부패하면 국민은 헐벗을 것이다. 농민들도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래, 나라가 망하는 데에는 폭정만한 게 없지. 그 사람을 이용해야겠군.'


러시아의 몰락에 관해서라면 익히 알고 있는 포인트가 있었다.  


러시아의 원흉, 폭정의 일등공신, 바로 요승 라스푸틴이었다.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를 구워삶아 온갖 폭정을 저지른 인물로 유명했다. 


김주노는 설명충을 불러 라스푸틴의 정보를 들었다.




우선 라스푸틴이 황실로 들어간 해는 1903년이었다. 김주노가 러시아에 떨어진 시기는 1900년이었다.


3년의 차이가 있었다.


김주노는 생각했다. 


'예언을 하고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는 거라면 나도 자신있다. 내가 먼저 라스푸틴보다 3년 먼저 황실에 입성해서 황제 부부를 구워삶아야겠다. 폭정이 먼저 시작되면 러시아 제국도 3년 먼저 멸망하지 않을까? 그럼 소련이 3년 먼저 성립하는 거고, 그냥 역사대로 흐르게 놔둬도 소련은 실제 역사보다 3년 먼저 붕괴하지 않을까?'


김주노는 이렇게 단순하고 초딩적인 생각을 하고 곧장 황실로 향했다. 


황실로 가는 길에 다시 설명충 요정을 불렀다. 황실을 개판으로 만들려면 라스푸틴이 했던 대로 해야만 했다. 라스푸틴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라스푸틴은 어떤 삶을 살았나?


시베리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10대를 보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어느날 문득 수도승이 되겠다고 선포하고 집을 떠나 예언가의 삶을 시작했다.


라스푸틴은 기회를 잘 잡았다. 1903년 신비한 예언자 행세를 하며 황실에 입성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오컬트나 신비 현상에 관심이 많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푸틴은 기도 퍼포먼스가 압도적이었다. 말빨도 좋았다. 


당시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라스푸틴이 기적적으로 황태자를 치료했다. 


치료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라스푸틴은 황태자를 치료하면서 모든 약을 끊게 했다고 한다. 자기의 기도면 다른 약은 필요없다고 자신했다.


공교롭게도 황태자가 중단한 약물 중에는 혈우병에 치명적인 아스피린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 걸 끊게 한 것만으로 혈우병을 낫게 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황태자의 완치 후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의 눈에 들어 실질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비선실세로 자리잡았다.


니콜라이2세는 애초부터 정치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라스푸틴의 말이라면 곧이 곧대로 듣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책상 앞 정치보다는 몸으로 뛰는 걸 좋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니콜라이 2세는 정치는 뒷전으로 하고 직접 전장으로 나가서 전투를 진행하기도 했다.


황실에 황제가 사라지자 러시아는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폭정이 반복되었다. 국민은 분노하였고, 화살은 최종 책임자인 황제를 향했다.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 폭정의 원흉은 황제가 아닌 라스푸틴이었다. 러시아를 쥐락펴락 하던 라스푸틴은 결국 1916년, 그러니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반대파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을 지시한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이 아닌 황족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라스푸틴이 유명해진 건 자기의 죽음까지 예견했기 때문이다.


예언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내가 만약 러시아 국민 손에 죽으면 러시아 제국은 앞으로 수백 년 번성할 것이고, 귀족들에게 죽는다면 앞으로 25년간 러시아는 피에 물들 것이다. 또 만약 황제 일족이 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면 2년 내에 황제 일족은 러시아 민중에 의해 모두 죽을 것이다."


실제로 라스푸틴이 죽고 1년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다시 2년이 지난 뒤, 예언대로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은 임시정부에 의해 사형당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라스푸틴은 희대의 요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김주노는 검정 망토를 두르고 두어달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언가 행세를 했다. 설명충 요정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유럽의 신지식에 예언 몇 개를 덧붙이니 사람들의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몇 달이 더 지나 김주노는 과감하게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이정도면 소문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라 짐작했다.


궁전 경비대를 대면한 김주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나를 막으면 황태자가 위험해진다. 나는 나라를 구하러 온 것이다."


경비대원은 김주노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외지인을 황제에게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망설이는 경비대를 향해 김주노는 두손을 번쩍 들고 호통했다.


"오! 저주가 쏟아지려 한다. 오늘을 넘기면 모든 책임을 너희가 져야 할 것이다!"


움찔한 경비대원은 상관을 불렀고, 그 상관은 다시 더 높은 상관을 불렀다. 김주노는 유명인이었다. 궁전대원부터 고위층 기족까지 궁전 앞에서 김주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몇 십분 실랑이가 일고, 멀리서 아름다운 여인이 우아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김주노는 금세 알아챘다. 황제의 아내, 알리사였다. 김주노는 왕비를 알아보고 더욱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제까지 나의 길을 막을 셈인가! 황태자가 무엇때문에 고통받는지 나는 알고 있다! 어서 길을 열어라!"


김주노의 작전은 먹혀들었다. 알리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와 김주노의 행색을 살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과연 기이한 풍채를 하고 있군. 길을 터 주어라. 내가 니콜라이를 알현할 수 있도록 하겠다."


김주노는 알리사 덕에 궁전 구석에 거처를 얻었다. 정체불명의 거렁뱅이 같은 예언자가 황제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욕재개를 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그렇게 김주노는 거처에서 1주일을 보냈다.


약속한 날, 김주노는 열 댓명의 경비대원에 이끌려 황제실로 걸어갔다. 겉으로는 막무가내 예언가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죽이진 않겠지? 과거 왕들은 조금만 비위를 상해도 국민을 파리잡듯 죽였다고 하는데, 연기가 들통나면 나도 죽으려나?'


온갖 상념이 일었지만, 지금은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알현실에 도착한 김주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김주노는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서 대기하라는 경비대원의 말을 무시하고 사치스러워 보이는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아니,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어서 일어나지 못할..."


경비대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현실 문이 열리더리 떨떠름한 표정의 부부가 들어왔다. 니콜라이와 알리샤였다. 부부의 뒤로 병약한 꼬마 한 명이 비실대며 따라 들어왔다.


니콜라이 2세는 거만하게 앉아있는 김주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과연, 미치광이 예언가라더니 죽음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그대로 두어라. 어디 그 잘난 혀가 잘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




김주노는 군침을 삼켰다. 


니콜라이 2세가 바로 황태자를 내어준 건 아니었다. 검증이 필요했다. 김주노는 예상했다는 듯 역사서에 남아있는 황제와 황후의 특징을 이야기했다. 몇 달 뒤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정세가 어떻게 흐를지도 예언했다. 어쩐일인지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일반 역사는 실제와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반년만에 김주노는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제 화룡정점을 찍을 시간이었다.


황태자 앞에 선 김주노. 


라스푸틴이 했던 것처럼 기도 흉내를 내며 며칠 간 복용 중인 약을 끊게 했다. 다행히 실제 역사처럼 황태자의 병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김주노가 슬슬 폭정을 유도하는 조언을 해도 황제나 황후, 모두 귓등으로만 들었다. 김주노가 니콜라이 2세를 이용하려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니콜라이 2세가 김주노의 예언 능력만 이용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김주노는 오랜만에 설명충 요정을 불러 따졌다.


"네가 알려준 라스푸틴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했는데 황제 부부가 내 말을 듣질 않네? 뭐가 잘못된 거지?"


설명충 요정은 답을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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