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김주노.
옆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볼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추웠다.
힐끗 눈을 돌리니 금발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러시아 어딘가 떨어진 게 분명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몇몇 보였다.
'중세시대는 아니군. 그렇다면 현대 시대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대부분 단층이었고, 차가 다닐만한 도로가 없었다.
김주노는 머리를 굴렸다. 대체 어느 시대에 떨어진 걸까. 근대시대, 아니 그보다는 약간 더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대략 19세기 정도?
김주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군중을 향해 소리 쳤다.
"다들 안녕하시죠! 제가 어제 과음을 했나 봐요. 눈을 뜨니 차가운 바닥이네요! 하하하. 그나저나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냉랭했다. 별 미친놈을 다보겠네,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김주노의 귀까지 닿았다.
왜지? 김주노는 급히 자기 몸을 살폈다. 추운 날씨에 하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부끄러운 생각에 두 손으로 몸을 가린 뒤 수풀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한참 숲을 헤매다 농가가 보일 때면 정중하게 옷을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하나같이 매몰차게 거절했다. 다들 김주노를 미친놈 혹은 산적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남권 아이템을 선택할 걸 그랬나!'
후회해도 늦었다. 김주노는 머리를 굴렸다. 네비 요정을 통해 공짜로 옷을 구할 수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하면 어떨까?
김주노는 곧장 네비 요정을 불렀다.
언제 나타났는지, 쌀쌀맞은 인상의 네비 요정이 김주노를 째려보고 있었다.
"뭐냐? 왜 불렀어? 용건만 간단히 해라."
김주노는 욱한 감정을 삭이며 옷을 찾아 달라고 했다. 요정은 시큰둥하게 수풀이 우거진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요정의 손가락을 따라 몇 분 걷다 보니 차가운 바위 사이에 사람이 한 명 누워있었다.
"뭐야? 저 사람 옷을 빼앗아 입으라고? 합법적이고 양심적으로 옷을 구할 방법은 없을까?"
"그냥 입어. 시체야."
김주노는 흠칫했다. 캐나다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깊은 숲속에서의 꽁꽁 얼어 있는 시체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김주노는 천천히 시체의 옷을 벗겨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으며 시나리오의 미션을 떠올렸다.
소련을 붕괴시켜라.
'그럼 여기는 소련인가? 몇년도쯤 됐을까?'
단추를 여미며 김주노는 네비 요정을 다시 불렀다.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번에는 근처 가까운 도서관의 위치를 물었다.
도서관은 멀리 도시처럼 보이는 곳 한 가운데에 있었다.
생각과 달리 웅장한 건물이었다. 국립 도서관이라고 해도 될만큼 넓고 화려했다.
로비에 들어선 김주노는 쭈뼛쭈뼛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김주노의 행동이 미심쩍었는지, 멀리서 사서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비쩍 마른 체형에 진한 콧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김주노는 쭈뼛거리며 역사 책의 위치를 물었다. 진한 콧수염의 사내는 친절하게 서가의 위치를 알려준 뒤 사라졌다. 김주노가 평소에 생각했던 불곰국의 우락부락한 남자 이미지와는 다른 느낌의 사내였다. 아무튼 김주노는 사서가 알려준 곳에서 책을 읽으며 여러 사실을 알아냈다.
일단 지금의 위치가 과거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기는 딱 1900년이었다.
'가만, 1900년이면 아직 소련이 등장하기 전 아닌가? 등장하지도 않은 소련을 붕괴시키라고?'
막막했다.
미션을 완수하려면 러시아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실제 역사를 알아야만 어느 포인트를 뒤집어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김주노는 외쳤다.
"도와줘! 설명충 요정!"
자, 이 부분은 설명충 요정이 설명한 러시아의 실제 역사 부분이다.
김주노는 설명충에게 러시아의 통역사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설명충은 고개를 저었다. 미션을 위해 반씩 나눠서 설명하겠다고 했다.
어떤 기준으로 반을 나누나? 소련 성립 전후를 기준으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스탈린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누었다.
먼저 스탈린 이전, 9세기부터 19세기의 역사를 보겠다.
러시아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대충 9세기 정도부터 시작된다. 그것도 9세기에 러시아라는 나라가 생겼다는 것이 아니고, 그 즈음부터 러시아 민족의 원형이 생겼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쯤이다.
물론 러시아의 역사를 러시아'인'의 역사로 보지 않고 러시아 '지역'의 역사로 본다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 지역에는 어떤 유목민족이 터를 잡고 살아갔을 것이고, 투닥투닥 소규모 전투도 벌어졌을 것이다. 자연스레 땅 주인도 계속 바뀌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러시아 민족이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이후로 한정해서 본다면 역사는 훨씬 짧아진다.
시작은 9세기 무렵부터였다.
예전에는 러시아인을 '루스인'이라고 불렀다. 루스인의 역사가 러시아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데, 약간씩 견해가 다르지만 '루스인' 또는 '루스족'은 원래 북유럽에 살던 바이킹 중 하나였다.
즉, 노르드인 출신이었다.
어? 그렇다면 러시아인이 바이킹의 후예냐? 뭐, 평소 우스개로 불곰국 짤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면 바이킹에 가까운 민족 같기는 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자기들을 슬라브 민족이라고 부른다.
북유럽의 바이킹이 아니라 동유럽의 뿌리 깊은 민족이라는 거다.
이런 이유로 같은 슬라브 민족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같은 동유럽 국가와 계속 합치자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 시절에는 모두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족의 뿌리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대충 정리된 이론은, 일단 루스인은 바이킹이 맞고, 이 바이킹들이 동유럽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것도 맞다. 바이킹들은 나라를 세운 뒤 토착 민족이었던 슬라브족을 지배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세운 나라를 루스족의 나라라고 칭했다. 이게 바로 9세기에 등장한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다.
키예프 루스는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 그러니까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동로마와 다투기도 하고 교역하기도 하면서 나름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대국이 되기까지 거의 3~40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흥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무렵, 동쪽에서 무서운 아시아인들이 몰려왔다. 징기즈칸의 몽골이었다. 몽골 침략 당시 키예프 루스는 분할 상속으로 크고 작은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대부분의 공국은 징기즈칸으로 인해 순식간에 멸망했다.
몽골은 중앙아시아에 이어 아랍, 동유럽까지 초토화 시켰다. 서유럽까지 진출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딱 키예프 루스에 있는 동유럽 지역까지 점령한 뒤 몽골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본토에 있는 징기즈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추가적인 확장은 자제하고, 이미 점령한 지역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후 대부분의 루스계 공국들은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200년 이상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징기즈칸의 사망으로 몽골이 진출을 멈추는 바람에 겨우 초토화를 면할 수 있었던 공국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 공국이었다.
원래 모스크바는 볼품없이 작은 공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침략을 면하고 몽골을 잘 따르면서 급격하게 성장했다. 15세기가 되어서는 숨겨 두었던 발톱을 드러내 몽골 세력을 쫓아내기까지 했다.
지역 패권을 거머쥔 모스크바 공국은 다시 동유럽 지역에 루스족의 나라를 만들었고,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17세기 무렵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이제야 우리에게 익숙한 러시아의 실체가 형성된 것이다.
원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에 한정된 작은 나라였다. 17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형성될 무렵,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대항해시대를 열며 전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고 있었다.
어엿한 유럽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 러시아도 바다로 진출해 식민지를 만들고 싶었다. 문제는 배를 띄울 항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1년 내내 운영되는 부동항이 없다. 겨울만 되면 모든 항구가 얼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러시아는 계속 동쪽 육지로만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다 우리나라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바다를 건너 알래스카 지역까지 확보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가장 큰 특징이 광활한 영토니까, 이 부분은 좀 더 이야기해야겠다.
다들 알다시피 러시아 영토 대부분은 척박하고 춥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포함한 광활한 툰드라를 100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모두 점령했다. 시베리아는 지금이야 석유나 광물로 엄청난 노다지 땅이지만, 이때만 해도 쓸모 없는 땅이었다.
러시아는 관리하기도 힘든 시베리아를 굳이 점령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핵심은 모피였다. 캐나다에서는 비버가, 시베리아에서는 여우와 담비가 엄청난 모피를 제공했다. 모피 잡으로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다보니 태평양 근처까지 영토가 확장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러시아 제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국가가 불안정해졌다. 그러다가 세계 1차대전 중이던 1917년, 그 유명한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했다.
러시아제국이 멸망한 뒤 몇 년간 내전이 벌어졌다가 1922년에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우리가 잘 아는 소련이 세워졌다.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만든 뒤 당차게 국가 재건을 하려 했으나, 권력을 잡은지 2년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레닌이 사망하면서 당시 소련의 2인자였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으면서 독재자로 등극했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설명충은 갑자기 말을 머뭇거렸다.
"김주노님, 소련을 붕괴시키려면 일단 소련을 만드셔야죠. 그후의 역사는 소련이 성립된 이후에 다시 알려 드릴게요. 저는 이만 총총총."
설명충이 상큼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뭐지? 김주노는 멍하니 설명충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김주노는 도서관 가운데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1900년인 지금쯤이면 러시아 농민들이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에 차 있어야 할텐데, 도서관을 오는 중 보았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원래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유가 뭘까? 아무래도 김주노가 튜톨리얼에서 인디언 원주민을 발전시킨 게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김주노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피며 최근 동향에 관해 정리한 책들을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메리카 대륙의 상태가 실제 역사와 달랐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하긴 했는데, 영토가 대륙 동부 버지니아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가져야했지만 시나리오의 세계에서는 그저그런 약소국이었다. 북미 지역 대부분은 원주민들의 군소 국가로 난립해 있었다.
김주노가 흐트러놓은 역사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많은 원주민 국가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 식민지가 없던 러시아는 시베리아 모피를 갖다 팔며 소소하게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곧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평화로워서 혁명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하, 이걸 어쩐다.'
김주노의 고민이 깊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