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도구들

6. 형상화

by 무뿔

형상화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다.

그 이미지는 눈앞에 본 것을 그대로 떠올리는 기억일 수도 있고,
소리나 촉감, 맛처럼 비시각적인 자극을 통해 받은 느낌을
시각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일일 수도 있다.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과정과 의미는 다르다.

이미지가 떠오를 때 우리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이미지를 만들 때 우리는 여러 자극을 조합해
하나의 통합된 의미를 갖춘다.

정지용의 「향수」는 형상화의 좋은 예다.

시인은 우리가 세계를 통해 받은 인상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대신 시각, 청각, 촉각이 뒤섞인 공감각을 통해 느낌을 다시 빚어낸다.

시학에서 말하는 공감각은 감각을 바꾸는 기법이지만,
그 효과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앎에 깊이를 부여하고, 독자의 안에 새로운 형상을 남긴다.

형상화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때때로 비전을 만들기도 한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등장하는 ‘극복한 아웃사이더’들은
자신이 형상화한 이미지를
삶의 방향으로 끌어올린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형상은 머릿속에 그려진 장면이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 되었고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을 내가 보고 싶은 형태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비전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언스』를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것도 이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어떻게 협력해 왔는지를 신화와 제도, 허구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남아 있던 것은 설명의 구조보다는 자본과 신뢰가 결합할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축적된다는 하나의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사실 그 자체보다 함께 믿기로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그 신뢰가 유지되는 동안
실행력은 극대화되었다. 그리고 그 신뢰의 시작에는 완전히 사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야기,

꾸며진 진실이나 허구가 필요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이 형상은 하라리가 의도한 결론을 그대로 요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남겨둔 여백에서 독자의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에 가깝다.

이 불일치는 형상화의 결함이 아니라 특성이다.

형상화는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통과시켜 하나의 새로운 앎의 모습을 얻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상은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 똑 같은 글을 다시 읽을 때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은 이후의 읽기에서 계속 작동한다.

다른 책을 읽다가, 다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아,
이건 전에 읽었던 그 구조랑 닮았네.

그 순간 우리는 문장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형상화는
관찰과 패턴인식이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 남는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익숙한 언어로 곧바로 번역하지 않고,
흐름을 통과했을 때 어느 순간 하나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 모습은
붙잡으려 하면 흐려지고,
설명하려 하면 사라지지만,
다시 마주치면 즉시 작동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개 이때다.


형상화는 읽기의 끝이 아니다.

그 형상은 다른 책으로, 다른 이야기로, 다른 삶의 장면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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