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
펑퍼짐한 옷가지 사이로 바람이 기분 좋게 흘렀다. 높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숲은 참 푸르고 싱그럽게 보였다. 나무를 타는 일은 꽤 오랜만이었는데도 몸이 잘 따라줬다. 나는 꼬리를 길게 뻗고 나뭇가지 위로 두 발을 딛고 섰다. 그 뒤 상체를 약간 굽힌 뒤에, 빠르게 도약해서 다음 나무에 올라탔다. 이런 식으로 몇번만 반복하면 아마 금방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음, 지금 한 팔이 없어도 이 정도는 내게 아무런 무리가 못 되지. 오른팔이 없는 자리가 휑하니 시린 듯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었다. 나머지 왼팔과 두 다리, 길고 유연한 꼬리만으로도 나무를 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이래봬도 열여섯 살 때부터 10년 넘게 줄 위에서 하늘과 맞닿으며 살아온 몸이다. 나는 줄의 그 아슬아슬한 감각을 좋아했다. 바람을 읽어 균형을 잡고 조심스레 공중으로 발을 내딛는 바로 그 감각. 줄 위에서 서 있을 수 있다는 건 내가 내 몸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증명하는 일이었다. 흔들림 하나하나를 감각하고, 몸을 바로잡고, 시선은 정면을 보되 의식은 발끝까지 내리는 일. 정신이 하나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추락이었지만 나는 그런 긴장감마저 즐겼다. 줄을 탈 때면 살아있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고 내가 세상에 홀로 우뚝 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무를 타는 순간에 예전에 줄을 타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유롭게 생동하던 그 무대의 느낌 말이다. 뭐, 팔을 한짝 잃은 뒤로 무대에 서는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경주에 온 것은 신의 은혜라던지, 영광이라던지 하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었다. 단지 경주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들어왔을 뿐. 저잣거리에 붙었던 공고에는 ‘참여만 해도 백 냥, 우승하면 그 배로’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때마침 한 팔을 잃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나는 돈이 필요했기에 돈을 받고 경주에 나온, 그런 따분한 이유였다. 팔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광대로 일하며 관객들을 불러모았고, 밤에는 심부름꾼의 신분으로 이런저런 의뢰들을 받아 해결하는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작게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거나 잠긴 문을 따주기도 하고, 크게는 도적 떼에게 붙잡힌 사람을 빼오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았었는데. 그 모든 것은 오로지 돈 뿐이었다.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만큼 간절하게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공고를 봤을 때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나선 거겠지. 그리고 경주에 온 이상 우승도 당연히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무 위로 다니면 괴물들은 많이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나는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그 승냥이 녀석과 합류하기로 한 곳이었다. 그 말이 무색하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커녕, 식은 발자국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그늘에 잠시 서 있다가 공연히 혼잣말을 했다.
“역시 안 왔나.”
그래도 나름 의리 있고 본성은 착한 놈이었는데. 어제는 말다툼이 너무 크게 번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싸움의 전말은 이렇다.
시화도 원래는 바깥에서 나와 함께 심부름꾼으로 의뢰를 받아 해결하는 일을 했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아주 중요한 철칙이 하나 있다. 바로, 살인을 요구하는 의뢰는 받지 말 것. 또한 이것은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기도 했다. 비록 여러가지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가족을 빼앗아 버리게 되는 일은 하지 말자고 말이다. 하지만 시화는 그 규칙을 어겼다. 이 경주에 들어오기 전, 그는 거액의 돈을 목적으로 경주에 참여한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저께 밤에 그 일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내가 그의 뒤를 밟아 그를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시화와 크게 싸우게 되었다, 는 설명이면 좀 이해가 되려나? 그가 죽이려던 사람은 절벽에서 떨어지긴 했으나, 치명상은 없어 보였으니 제때에 적절한 치료만 받았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내가 중요한 순간에 시화를 말렸기 때문 아니겠는가, 음, 그렇고말고.
-신도, 너도 결국 그 잘난 위선 지키다가 팔병신이 된 주제에.
시화가 떠나기 전에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래도 약속 장소에 아예 나타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좀 늦는 걸지도 몰라 잠시 나무 위에 올라가 그를 기다렸다. 아까 보니 이 숲에 괴물들이 많던데 괜찮으려나, 하는 걱정 따위를 하면서. 쉽게 죽을 놈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니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좀 더 침착하게 대화했어야 하는데. 마음이 상했나 싶어 괜스레 애꿎은 하늘만 쳐다보며 시화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봤다. 저 자도 어차피 바깥에서 수배범이었던 자라고, 경주에 온 이상 내가 죽이지 않아도 언젠간 죽을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하는 말들 말이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보난 목소리였으나 침착하게 나뭇가지 위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어림잡아 세 사람 정도 되어보였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 딱딱하고 격식 차린 목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섞인 얇은 목소리. 잠시 대화를 듣다가 시화의 행방이나 물어볼까 싶어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안녕?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그리고 그들을 본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화가 죽이려 했던 그 남성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 밤에 봤던 황토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표정이 굳더니 순식간에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뭐라 대응할 틈도 없이 내 옷자락을 거칠게 붙잡고는 입을 열었다.
“너, 그 호박색 눈동자, 그 자리에 있었지?”
그때 날 봤던 건가.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근축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자리라니.”
그와 함께 있던 긴 머리의, 양 뺨에 돋아있는 다갈색 비늘들이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근축이라 불린 소는 그 말에 아무 감정 없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날 죽이려던 놈과 같이 있었지?”
안 그래도 시화와 그 일로 싸우고 온 참이라 그 이야기라면 나도 억울한 부분이 많은데. 나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그거 내가 말려준 거거든? 내가 거기 있었던 건 맞는데 그 덕분에 네 목숨을 구한 거라고. 감사 인사까지는 안 바랄 테니까 오해는 좀 풀지 그래?”
솔직히 이 증거도 없는 말을 믿어 주기는 할지 반신반의했으나 생각보다 그는 순순히 내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저 옆에 있는 뱀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는지 연두색 눈동자로 날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은 해도, 딱히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아 보이고. 그 옆에는 호랑이인가? 주황색 머리카락, 둥그런 얼굴, 눈매가 둥글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애가 경계와 호기심이 반 쯤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쨌든 근축의 경계가 좀 풀어지자 나는 적당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난 널 해칠 마음도 없고. 난 그냥 한 사람을 좀 찾고 있는데.”
뒷편에 있던 호랑이가 내게 물었다.
“누구를 찾고 있어?”
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에서 시화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악수이려나. 나는 아차 싶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만 뭐에 마음이 동했는지 금방 소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람을 찾고 있거든. 혹시 근처에서 쥐를 본 적 없어?”
“쥐는 왜?”
내가 그렇게 되물은 것은 문득 시화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한 쥐와 고양이에게 경주에 참여한 소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았었다고 했는데, 혹시 쥐와 원수라도 졌나 싶어서. 내가 알기론 시화가 오늘 아침에 후금을 받으러 서쪽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을 터이니 쥐가 아직은 그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원수라면 비밀로 하고 다른 사연이 있다면 근방 위치를 언질해줄 생각이었다. 시화의 말이 맞다면 이 자도 결국은 수배범일 테니, 목숨을 구했던 것과 별개로 저 소가 다른 사람을 해치게 둘 수는 없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 그것이 내 신념이었다, 비록 과욕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내 예상을 벗어난 말이었다.
“내 딸이니까.”
딸이라고?
난 한순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자기 가족을 죽이라고 사주할 리가. 나는 소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 의심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이 상황에서 저런 거짓말을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근데 애초에 둘이 종도 다른걸. 불가능하잖아. 혹시 친딸이 아닌건가? 아니, 설령 친딸이 아니더라도 이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인거지?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우선은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도저히 그의 표정이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널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그 쥐야. 쥐랑 고양이.”
“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표정도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자솔이는 그럴 애가 아니야. 아니…… 아닐 거야.”
그는 애써 믿고 싶은 걸 믿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믿고 버텨야만 살아갈 수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희망이 부서지는 순간이 가장 아프다는 것도. 비록 그는 표정 변화는 크게 없었지만 어쩌면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려나. 나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는 만큼 그에게 공감이 갔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아는 건 내 동료가 한 말뿐이야. 쥐와 고양이가 오늘 아침 서쪽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는데. 혹시 정말 오해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마침 나도 내 친구를 찾으러 그쪽으로 가봐야 하거든. 너만 괜찮다면-”
“잠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뱀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희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당신이 근축 씨를 죽이려 들었던 자와 여전히 한패일지도 모르는데. 이게 함정으로 유인하려 드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아까부터 계속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더니 역시나. 나는 그에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너흴 데려가지 않는다고 내게 손해되는 건 없어. 오히려 쥐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거 아닐까? 정 의심된다면 나 혼자 가지, 뭐.”
그때 소가 입을 열었다.
“……자솔이를 만나야겠어.”
뱀은 그 말을 듣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무어라 말하려 입을 떼었으나, 호랑이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그 말은 고이 접어두어야 했다.
“그래, 다녀와!”
호랑이는 지금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싱글싱글 웃는 표정이었다. 뱀도 더 이상의 일언반구 없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 무언의 허락을 한 모양이고. 나는 소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되니까 그리 멀진 않아. 그럼, 갈까?”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려 서쪽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그리 어렵지 않은 여정이 될 예정이었다. 목 뒤에 따끔, 하는 느낌만 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뱀이 침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내가 놀라 뭐냐고 묻자, 그는 내 상식의 선을 벗어나는 답변을 했다.
“독이에요. 아마 세시간 쯤 뒤면 몸이 굳기 시작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함정이 아니라고 확신이 들지 않아서 말이에요. 근축 씨와 함께 무사히 돌아오시면 그때 해독제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너무 늦게 돌아오거나 저희가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뭐, 해독제가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