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myungdan Nov 26. 2022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 아내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여자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 아내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우문이자 현문이다.

부부의 합과 그들 상대의 삶을 압축한 질문이어서 현문이고 권태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의 행복 추구권을 모른 척해서 우문이다.



상대방을 예스나 노로 일언지하에 평가해 버리는 것은 어쩌면 모진 일이다. 그러나 함께 살아온 부부라 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것은 그동안 부대끼며 살아온 시간 속에서

결국 남은 뼈 있는 한마디며,

남은 인생으로도 만회될 수 없는

어쩔 도리 없음을 수긍하는 벼락 같은 한숨이기도 하다.



남편들이 표현이 적고 쑥쓰러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망설임없이 노라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쪽이다.

굳이... 다음 생애까지...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삶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과단성은 지금과는 결이 다른,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에는

지금의 배우자에게 더 이상 바랄 수 있는 게 없다는, 심히 아쉽다는 포기선언과도 같아 어떤 서글픈 추론을 하게 된다.

남편 중심의 위계 질서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과 압박에서, 물리적 힘의 결여에서 여성들의 자존감 박탈이 적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를 만나겠다는 부부를 드물게 접할 때가 있다.

몹시 존경스러우나

저 발언이 진심일까?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없는 건 아닐까? 열두 고비 인생 마지막에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건 내 인성의 문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민낯을 모르지 않기에 그 부부의 삶의 속내와 인생 철학이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신념에 상대를 종속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칫 우리는 비합리적 신념에 매몰돼 자신의 의식의 흐름 속에 상대방을 욱여 넣으려 한다.

설령 합리적 신념일지라도 상대방이 일상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미혹한 중생 다루듯 가르치고 강제하고 과도한 감정을 싣는다면

겨우 다다른 이성조차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파묻히게 된다.



별다른 의문 없이 지나치지만 상식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너가 생각하고 나도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보통이 어렵고 귀해졌다.

다른 기질과 다른 성장배경과 다른 사회경험이 딱딱하고 거친 껍질이 되어 상대를 스친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하물며 정답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천지에 널려 있는 공감이 그래서 어렵다.

대립각이 많아진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여파도 부부관계에서 별난 얼굴 더 별스런 얼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상대도 의식의 흐름이 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우리는 한없이 서툴다.

신념이 곧 그 자신이자 우열의 기준이라

갈등과 충돌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대에 대한 비난과 신념의 저주가 준비되어 있고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실천하기는 좀체 어렵다.

신념은 질긴 생명체여서 다시 태어나도 그의 삶 전체를 꽉 부여잡고 있을지 모른다.

평생 행복하게 살겠다는 시작의 다짐과 열정은 성실을 잃어가고 결국 무너지기도 한다.

인연은 이 생에서 끝이다.



부부란 버진로드를 벗어나면서부터 이제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삶과 격투를 벌인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돌진한다.



남편과 나는 서로가 척박한 땅이었다.

어떻게든 개척하려 했고,

순간 순간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잊을 만큼 정복해야 할 험난한 산이었다.

그러나 쓸모 있는 땅을 얻지 못했고 점령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무지한 도전일 뿐이었다. 전리품은 상처였고 얻은 것은 함께 뒹굴며 쌓은 얼마간의 전우애와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양방향의 동등한 사랑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은

균형을 잃은 시소가 흙바닥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팀플레이가 어렵다. 너무 다르다.

남편은 형제 서열에서 맏이다.

형제 많고 가난한 남편의 성장 배경

화합이라는 생존 동력을 낳았고 '함께'는 무의식의 깊이를 가져 존재를 장악하고 있다. 자연스레 명령이 동반되는 위치였다.

자기 자신이 없거나 자신을 우뚝 내세우는 양면성에 일관성 찾기는 내 인생 최대의 난제다.



우당탕탕 치이거나 집합으로 스스로 커가야 하는 성장환경,

역시 그 시대의 가난을 안았지만

하나 하나 부모의 손길이 닿은 환경은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

둘의 팽팽함은 지칠 줄 몰랐다.

무조건적인 양보와 배려, 자율과 자립,

가부장적 질서와 존중에 대한 인식,

집합과 개별의 유연성, 주도성과 주체성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지키며 평행선을 이어갔다.

각자의 신념이 정답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의 금과옥조는 존중과 배려, 그리고 융통성이다.

이 만사형통의 지침을 가슴에 새기고 탄력있게 자신을 확장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기질과 노력이 바탕이 된 부부들이 있다.

부침 없는 마음과 잔잔한 관심으로 소확행을 실천하는 부부들이 있다.

상대의 만족도를 키우고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는 패턴을 깨우치고 이룩해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다음 생의 부부의 연도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구축된 존재의 벽돌은 누군가와의 합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된다. 스스로를 확장시키기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 한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강한 기질이라는 공통적 요소는 예의 없음에 민감하면서도 인정하기가 인정받기의 기초이며 인과관계라는 것을 간과한다.

상대의 두드러진 장점을 잘 알면서도 표현의 빈도가 서로 낮은 것은  MSG가 적은 생활의 태도도 태도려니와 인정하기보다 인정받기를 당연시하는 권위주의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인정은 그의 역할이나 능력에 대해 그동안 쌓은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이지 이르집어 정리를 하거나 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것이라도 자발적이지 않은 인정은 저항의 언어를 준비하게 한다.

서로의 장점은 현실만큼 대접받지 못했다.



입에 양기가 있는 사람은 이면을 짐작해 볼 필요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부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은 일관성은 있으나 마음의 변화를 보이지 않아 잔재미가 없다. 애교용 멘트는 오글거리고 살가운 반응이 어색하다.

시쳇말로 콩을 함께 키울 수가 없다.

알콩달콩이 어렵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감탄하지만

기질과 정서적 기후가 다른 사람끼리

소확행을 무시로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시간은 좀처럼 방향을 틀지 않는다.

한숨 자고 일어난다고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디테일은 셩격과 신념이라는 맹목적 관성 앞에서 왜곡된 생명을 다시 얻을지 모른다.

그래서 내 대답은 노다.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 놓이고, 고마운 부분이 있다.

남편은 영리하다. 주어진 어떤 인생 미로도 끝까지 해결해낸다.

남편은 천성이 개미다. 왕성한 경제 활동과 나이답지 않은 근육, 몸 아끼지 않는 투박한 손이 그것을 말해 준다.

사람이 재산이라면 남편은 재벌이다.

남편은 헌신적이다.

홍익인간의 후예답게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바친다.

이런 남편, 이런 아빠를 만난 건 운빨이 있는 거다.

그 볕은 우리에게도 따뜻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이 특이하고 특별하다는 걸 아는지 어느 날 남편이 이런 멘트를 쳤다.

자신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여자와 사는 남자라고



죽은 남편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쓸쓸함을 내비치던 어느 아주머니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우리는 서로의 무덤 앞에서 어떤 쓸쓸한 생각을 하게 될까?

훌륭했지만 아내에게 맘껏 인정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나라를 구한 여자였으나 존재의 빈곤과 의문에 괴로워한 사람이었다고


폭넓은 이해와 찰떡 같은 호응과 아낌 없는 인정, 진심 다한 존중을 받는 삶이 남편의 다음 생이길 바란다.

첼로 같은 여자이기보다는 탬버린 같은 여자를 만나 전생에 나라를 구한 남자로 섬김 받길 진심으로 바란다.

부부 관계를 얻고 부부관계를 쌓는 성격과 신념을 다음 생이 준비하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만  나의 '노'가 구원 받을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누군가의 집이 돼 본 적이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