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emyungdan Oct 18. 2022

탕탕!! 탕탕탕!! 지름신과 벌이는 총격전입니다

혼자가 하나가 되는 정원




나는 한때 옷을 좋아했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장바구니와 쇼핑한 종이백 두 개를 들고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는데 2학년 둘째가 발걸음 소릴 들었는지 부리나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저녁 시간이라 많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저녁 반찬에 관심을 보일 아이가 쇼핑백 두 개에 시선을 꽂았다. 그리고는 별안간 철퍼덕 엎드리더니 두 손으로 만든 권총을 뻗어

탕탕!! 탕탕탕!!



엄마 껌딱지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인 아들의 갑작스런 돌발, 아니 도발에 적이 당황했었다.



"왜왜?,  왜 그래??"


"꼼짝 마세욧! 지름신 죽이려고요!!"



아이의 창의적인 퍼포먼스에 일면 웃음이 났지만 부끄럼의 세포가 순식간에 열리는 둣 탄산 터지듯 따가운 소름이 안면에 찡하게 돋았다.

둘째가 제대로 한방 먹였다.

그 타격감은 아직도 살아 있다.



내가 좀 성실하긴 하다. 무엇을 시작하면 열심히 하는 편이다.

꾸준히 장롱에 옷탑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남편도 이제 그만이라는 우려를 완곡하게 표현했었다.

싼 거 여러 개 사지 말고 좋은 거 하나 사 입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전혀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분위기가 잠깐 썰렁해지긴 했어도 산들바람처럼 지나갔다.



언어란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

남편에겐 죽어도 못 다 입을 옷이 있다.

떨어져서 버릴 일이 좀처럼 없는 요즘 옷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시대의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남편의 말을 생각하면 공연히 울적해진다. 이 완고한 신념은 스스로 보상이 있을지 모르나 대가를 치를 때가 더 많다.

옷의 가치에 대한 교감과 공감이 부족하니 충돌한 세월이 적지 않고 원치 않는 사회적 편견에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구국의 일념으로 12척의 배라는 희망의 불씨에 불을 붙이려 했디면 남편에겐 몇 벌의 옷으로 빈한한 성장 환경을 구원하기 위해 버틴 인생 과정이 있다. 옷의 사회적 기능이 결여된 생존의 긴 피복 생활이었다.

그 습관은 세포와 세포 사이에서 유전자처럼 남편을 지배하고 있다.

옷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옷이 주는 즐거움을 배우지 못했고 옷이 주는 행복감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은 옷린이다.



남편의 말은 나에게 이렇게 들렸다.


그 많은 옷 언제 다 입으려고!


좋은 옷 하나 사서 떨어질 때까지 입어야지...



아찔하다! 게다가 위험천만하다!

의류 업계 사장님의 경제 활성화에 대한 헌신과

디자이너들의 깨알 같은 분투와

생산라인의 장인정신을 외면하라고!

그럴 순 없다. 그건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손실이며, 무엇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정서학대다.



혼수 그릇을 28년째 쓰고 있다. 간혹 거친 수세미로 흰색을 지켜내야 한다.

코끼리처럼 크고 무거운 전자레인지가 28년째 건재하다. 네댓 번 위치를 바꿔가며 작동스위치를 눌러대야 돌아간다. 경첩이 어긋나 삐걱거리는 장롱이 안방을 지킨 지 28년이다. 수리를 해도 연식에 무색하다.

어디 가구 가전제품뿐이랴!

남편은 결혼식 때 입은 통 크고 품 넓은 양복을 간직하고 있다. 유행에 밀려 지나치게 촌스럽지만 1급 기능사 양복의 품격을 버릴 수 없어 안주머니 위 금색실로 박은 이름을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인생 최고의 옷이기도 한 그 옷을 입은 건 열 손가락 안쪽이다.

핑계를 대자면 우리의 좁은 공간이 소화불량이 된 것은 남편의 버리지 않는 습관도 한몫을 한다.

우리 집에 들어온 물건은 귀신이 돼야 나갈 수 있다. 같이 세월 맞으며 주름지고 검버섯 하나 둘 피면서 늙어가야 한다.



남편이나 나나 집안에 들인 물건은 관리하며 사는 편이라 그 세월에 이 정도면 깨끗하고 온전하긴 하다. 그래서 내다 버릴 이유가 궁색하다. 결딴이 나지 않는 이상 매만지며 살아야 한다.



알뜰함에 집중하면 아무래도 변화는 적다.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변화를 찾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니 양념처럼 삶의 맛을 내주는 변화가 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변화가 없는 일상의 반복은 마음에 곰팡이를 피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의 쇼핑 태도는 변화에 대한 결핍에서 촉발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변화에 대한 돌파구를 내가 좋아하는 옷에서 쉽게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이의 촌철살인 센스나 남편의 뼈 있는 조언만 보자면 가정 경제를 좀먹는 나쁜 손이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마치 스카이라운지에서 무료 커피 마시고 가수들 초대권 날아오는 유명 백화점 우수 고객인 줄 알겠다.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쇼핑 핫플레이스는 아울렛 매장 이벤트홀이다. 스트레스를 풀기엔 이 만만함이 제격이다.

매대 위 예리한 사냥개가 돼 본다. 보물찾기를 하며 조용히 욕망의 한 마당을 펼친다. 안목은 역시 물건을 찾아내고 성취감은 천장을 찍는다. 착한 가격은 계획에 없던 구매의 죄책감을 잊게 해 주고 어느새 지름신은 강림한다.

가성비가 기준이 된 옳은 쇼핑은 좀체 가라앉지 않는 편두통을 사라지게 하고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지는 충족감을 준다. 욕구에 대한 자유는 마음의 건반을 두드리며 일상을 새롭게 작사 작곡한다.

여기서 주의하자!

미안함에 남성복을 기웃거렸다간 큰일 난다.

남편 옷을 샀다간 낭패를 본다. 충돌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못 다 입는 옷이 집에 있기 때문이다. 샀다간 내 발등 내가 찍었다는 한탄을 또 하고 말 것이다.



물건의 역사와 스토리와 알뜰함을 사수하려는 남편을 더 이상 자극해선 안 된다. 그 또한 정서학대일 수 있으니.

모름지기 옷이란 TPO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내 옷의 철학만 고수하면 된다.



물욕의 덧없음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두 그것을 실천하는 성인이었다면 지금의 문화와 문명은 대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섬세하게 분화되는 우리의 다양성은 어디쯤에 있을까?



욕구와 욕망은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욕망의 덩어리가 인간사고 인생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삶은 욕망의 상호작용을 한다. 욕망의 사회적 소비는 욕망을 파생시키며 변화를 창조하고 다양성을 잉태한다. 그 욕망의 중심에 옷이 있다.

나 또한 옷을 통해 개별적 신체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재구성하며 욕망의 고리에 가담한다.

그 속에서 집단 소속의 욕구가 해소되기도 하고 인정의 욕구가 충족되기도 하며 그것은 성취의 욕구로까지 뻗어 삶의 다양한 동력을 이끌어 낸다. 이것이 옷의 가치이며 옷의 덕목이다.



삶의 군더더기가 될지라도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기꺼이 설렘의 변화를 경험한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본능! 지름신은 죽지 않았다!



지금 이 공간, 아울렛 이벤트홀

발을 잠시 묶어 둔다.

앗! 지름신을 정찰하는 드론이 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윙~ 윙~ 윙~

지름신이 나대면 불을 뿜을 것이다.

탕탕!! 탕탕탕!!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 아내와 결혼하시겠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