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모퉁이엔 인연이 있다
다짜고짜 한국어 생존기
싸늘한 바람이 서늘하게 변해 가며 들판을 비울 때
보티의 집에서도 큰 한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버렸다.
위암과 췌장암을 안 지 3개월 만에 보티의 시어머니는 서산에 걸린 해가 해넘이 하듯
돌연 저 세상과 마주하셨다.
그 순간 덧없는 삶이 말할 수 없이 시렸다.
“그런 거 말고 예쁜 과일로 좀 내놔라!”
“막 담은 열무김치에 밥 한 술 잡숴 봐요~!”
없이 살아도 남의 옷은 얻어다 입히지 않았다며
귀하디 귀한 손자 옷으로 보티가 사 온 구제 옷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리시던 분,
쩌렁쩌렁 위세 당당한 분의 이 세상과의 인연의 소멸을 보며
나는 인연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니니, 라이, 보티, 린!
이 예쁜 이름들과 길고도 짧은 80회기의 수업이 주어졌다.
고만고만한 날들이었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오늘이었고 내일이었다.
그 속에는 물론 우리들의 성실한 일상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온몸에 빗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섰을 때
니니는 부리나케 화장실 문을 열고
씻으라고 하며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수건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미안했고 니니는 니니대로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매번 차려내는 빵과 차에 극진함이 더했다.
입술을 몇 번 소리 없이 움직이고 나서야 한 문장을 드러내는 니니가
그날따라 한국어 발화에 신중함보다 시원한 용기를 보여 주었다.
비를 뚫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니니의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낯설었지만
이 상황이 각자의 소임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 어느 멋진 날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유쾌해졌다. 나는 치즈를 외치며 셀카를 찍었고 그날의 잔향은 우리의 추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니니와 나,
만남 내내 비처럼 스며드는
사려 깊은 인연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평면적일 수 있을까!
라이를 만난 첫 소감이었다.
표정이 없는 데다 표현까지 부족하다.
집합 교육에서 기초를 두 번씩이나 했는데도 읽기가 어렵다.
자음의 음가와 획순을 다시 공부해야 했고
수업의 양은 다른 학생의 사분의 일 정도다.
게다가 라이는 부업까지 해야 하니...
진도를 위해 학습 점검을 할라치면 석고상이 되어 그 순진한 눈만 내 눈 언저리를 찾아 굴린다. 답답함에 머리가 훅 뜨거워지지만 그러나 어쩌랴! 이런 라이가 밉지 않으니!
결국 내가 하는 것은 웃음을 터트리는 일이다.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아이 같은 부끄러움과 막막함을 지니고
지도사의 반응을 살피고 기다리는 모습이 연민을 일으킨다.
그간 띄어쓰기도 좋아졌고 본래의 음가를 많이 따라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라이가 하면 감탄스러워진다.
이런 나의 호들갑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세상살이 기본을 지키며 순박하게 살아가는 라이,
보듬어야 할 인연이다!
똑똑 노크를 하자
‘내가 열 거야’라는 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아너, 하세요~!”
오늘도 안은 반원으로 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리는 발레리노 인사를 한다.
다섯 살배기 안 뒤에는 스물세 살 엄마 린이 언제나 서 있다.
안의 아빠는 지금 남편이 아니다.
첫날 설명 없이도 단박에 알게 된 이 사실로 나는 잠깐 복잡했었다. 그리고 린이 흑백으로만 보였다.
그동안 흑백의 비난을 우박처럼 맞았을 그녀에게 나도 몰래 요란하게 우박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세 깨달았다.
그 누구의 인생도 흑백일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과거의 그녀가 아니라 현재의 그녀라는 것을!
린은 민트 같은 여자다!
굵직굵직한 이목구비가
작은 체구에도 시원시원하고 푸르다.
앉을자리 설 자리를 깨끗하게 판단하는 그녀의 센스는 더블 A다.
한국어 수업에선 또 어떤가
배운 어휘와 문법을 사용해 성찬을 차려 낸다.
그 결과물이 자랑스러워 사진 찍어 놓기를 여러 번...
무엇보다 그녀의 풍부한 생명력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시인이다!
담백하지만 삶을 관조하는 시인이다.
거칠고 깊은 내를 일찍 건너보아서인지
삶의 길이 좁고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노래한다.
기쁠 때보다 슬플 때 우리는 더 많이 배운다고 말한다.
진한 모성으로 가족의 사랑을 찬양한다.
이처럼 다채롭고 입체적인 그녀에게 배우지 않는 날이 없다.
린이 좋아하는 임정희의 ‘골든 레이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골든 레이디는 린이다!
정신적 유희의 인연이다!
삼가야 할 행동이 많음에도 시어머니를 떠나보낸 보티는 목하 열애 중이다.
한국 음식 삼매경에 빠져 있다.
된장찌개에 꼭 넣고야 마는 생물낙지와 활게.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남편도 비싸다고 타박을 한딘다.
그러나 보티, 너무도 당당하다
초급 1권에 나오는
'A-지만 B'를 야무지게 활용한다.
“비싸지만 맛있어요!”
졸라맬 허리띠가 필요한 살림임에도 두둑한 배짱이다.
그 배짱, 한국어 수업에서도 제대로 발휘된다.
“화나요, 입이 커요”
“아~ 목소리가 커져요?”
“내 머리가 높아요”
"머리를 묶었네요!"
“눈이 자요, 울어요!”
“눈을 감고 울어요?”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종횡무진한다.
돌쟁이 아들이 수업 중에 계속 울어대자
보티는 아랫입술 안쪽을 살짝 물고는
몹시 화났다는 표정으로 다다닥 엉덩이를 때렸다. 그러면서 외친다.
"고분고분! 고분고분!!"
그때 생전의 전라도 시어머니, 배어 나오는 웃음 지그시 누르며 보티의 열정적인 한국어 행진에 한 마디 하셨다.
“염병하네~~!”
보티는 자신이 알고 싶은 단어는 언제든지 찾고 물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표현해 냈다.
은근히 수다스럽고 귀여운 이 여인,
권태롭지 않은 이 여인을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즐거운 인연이다!
‘길에 돌도 연분이 있어야 찬다'고 했다.
하물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한국어지도사와 대상자는 깊어도 너무 깊은 인연이다.
한국어 학습이라는 긴요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나라나 부모처럼 선택한 관계가 아니라
만나진 관계다.
그래서 인연이다.
인연이라 이름 지으면 상대가 좀 더 소중해진다.
그들을 더 이해하게 되고, 더 격려하게 되고
더 응원하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난
입을 다물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어로 입을 열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선택에 확신을 갖도록 격려했고
지금 이곳에서 행복한 생의 지도를 그려보라고 응원했다.
그러는 사이 수업의 끝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의 인연들~!
거칠 것 없는 가을 하늘의 패기
여러분 마음폭 다 펼쳐 받아 봐요!
한국어 농도도 파란 가을 하늘처럼!
드높은 한글의 정기받으며
드넓은 한국어의 가능성 열며
진실되고 유쾌한 인연 일구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