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달인과 약속의 요정

3부. 쉬운 사람들.

by 박나킨


나는 미루기의 달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체크리스트에 같은 줄을 세 번 옮겨 적는 순간, 메모지 끄트머리에서 작은 요정이 깨어난다.

풀 냄새 같은 숨, 스티커만 한 날개, 이름은 약속이다.


같은 일을 세 번 미루면,

약속의 요정이 나타나 그중 '가장 작은 약속'하나를 오늘 안에 꼭 지켜야 한다.


오늘도 같은 줄이 세 번째로 칸을 옮긴다.


화분에 물 주기

요정이 메모지 그림자에서 기어 나와 내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린다.

"가장 작은 약속부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간다.

컵에 반 모금만 담는다.

화분은 생각보다 목이 말라 있었는지, 소리 없이 물을 바로 흡수한다.



공원 1시간 뛰기

귀찮다. 벌써 세 번이나 미뤘다.

요정이 나타나 운동화 쪽으로 간다.

"가장 작은 것부터요."

운동화를 신는다. 그래, 5분만 걷다 오자.

5분, 10분, 걸었다. 한번 뛰어볼까, 30분을 뛰었다.


약속 요정은 스티커처럼 내 손등에 붙었다가, 조금 지나 사라진다.

남은 건 체크박스 위의 선명한 '브이'자 표시와, 책상 위 작은 물자국 하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계획의 첫 실천은 늘 한 톨 무겁다.

가장 작은 약속부터라도 지키면 한 톨 가볍다.

그 정도라면 괜찮다.

미루기의 달인에게도, 가끔은 지켜지는 약속이 필요하다.


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나는 펜 끝으로 다음 줄을 가볍게 두 번만 두드린다.

세 번째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


괜찮아. 오늘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내일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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