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 미약 상태의 플래너 계약
우리 부부의 결혼은 사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더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1년, 사계절을 다 겪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준비하려고 우리 둘은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 결혼박람회를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의 우리는 겨우 100일도 못 채웠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박람회를 왜 갔냐면 그것도 사실 가려고 간 건 아니었다. 우리는 주류박람회가 목적이었다. 코로나가 막 끝나고 오프라인으로 행사들이 다시 주최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갔던 주류박람회는 아마도 역대급 인파가 모였던 것 같다. 티켓을 미리 사두고 입장만 하면 되었는데, 입장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줄의 끝을 찾던 차에 행사장 바로 앞에 결혼박람회 스탠딩포스터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결혼박람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탠딩포스터에는 사전등록 시 입장료가 무료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결혼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박람회 또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여느 박람회처럼 예복업체 부스들이나 스튜디오 업체의 부스가 있고, 여러 가지 결혼에 관련한 업체들이 각각 부스를 열어놓고 한 곳 한 곳 각자 구경하면서 그중에 입맛에 맞는 곳과 계약하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다. 이렇게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겁도 없이 스탠딩 포스터의 QR코드를 찍고 박람회 당일사전신청을 했다. 그리고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우리는 주류박람회를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거의 마지막 타임에 입장하는 걸로 의견을 전달했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주류박람회를 열심히 즐기느라 시음할 수 있는 모든 부스의 술을 맛본 상태로 결혼박람회에 입장하게 된다.
직원분들도 술을 많이 드셨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우리 둘 다 술냄새가 폴폴 나는 상태로 입장했다. 입구까지도 따로 부스구분 없이, 뷔페처럼 긴 식탁 위에 스튜디오들의 앨범들이 펼쳐져있고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드레스 조금 전시되어 있었고, 당연히 이제 안쪽 공간에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가 펼쳐져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나도 상상과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자 덩그러니 책상과 플래너님들이 앉아계셨다. 내가 상상했던 결혼박람회는 결혼박람회는 사실상 이동식 플래너 상담소였다. 나와 통화를 했던 플래너님은 본인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제부터는 심지어 태블릿으로 자료들을 보여줬다. 상담테이블에는 볼펜 외에 다른 자질구레한 무엇도 있지 않았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로 앉아서 상담을 시작해야 했다. 플래너님의 첫 질문부터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본식 예정일은 언제세요?' 우리는 그때 막 100일을 채울까 말까 하던 차였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결혼식 날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예정된 날짜가 없다고 했고, 여기서 상담이 종료될 줄 알았다. 나는 취기를 품은 채 앉아있으니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담은 종료되지 않았고, 예정된 날짜 없이 스드메 견적을 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또다시 생각해 본 적 없던 분야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했고, 우리 둘 다 제일 많이 한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였다.
여기서 정말 플래너가 대단해지는 순간이 온다. 알아서 진행을 해주신다. 아까 입구에서 우리가 호감을 보였던 앨범들을 토대로 신부님 신랑님 골라오신 거 보니까 이런 취향이신거같다며 이런 스튜디오를 좋아하실 거 같다고 리스트를 뽑아주시고, 신부님 얼굴 구조에는 이런 방식의 화장이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이런 메이크업샵이 좋을 거 같다며 ChatGPT보다 더 똘똘하게 모든 것을 뽑아주신다.
문제는 상담이 너무 길었다. 아니면 상대성 이론이 나에게 적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취기와 함께 따뜻한 실내공기가 만나니 속까지 안 좋아졌다. 나는 이곳을 빨리 나가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최대한 토를 달지 않고 모든 질문을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최종 계약금에서 우리는 아직 홀도 안 잡은 상태라서 계약을 섣불리 하기 부담스럽다고 의견을 표시했지만, 플래너분의 수준 높은 감언이설로 결국 우리는 두 손을 들고 계약금을 이체했다.
문제는 스드메계약이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제휴업체와의 상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예복부터 혼주한복까지 결혼에 필요한 업체들이 줄줄이 줄 서있었다. 예복업체도 능수능란한 영업덕에 계약금을 걸게 되었다. 제일 악질은 신부관리였다. 특유의 일생의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가장 예쁘고 싶어 하는 신부의 마음을 들쑤시는 마케팅을 가장 악질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 예비신부에게 잘해주고 싶어 하는 신랑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 같은 경우는 딱히 예쁘고 싶은 욕심이 없어서 넘기려고 했지만, 그걸 눈치챘는지 바로 예비신랑에게 카드를 뜯어갔다. 우리가 잘못 걸린 건가 했는데, 지인분도 예약금 결제 후 바로 환불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정말 오만가지 이유를 대면서 환불을 회피했다. 애초부터 예약금을 안 거는 게 최고의 선택이다.
이후에는 어떻게 보면 다행인 건지 우리가 마지막 타임이어서 제휴업체들이 거의 자리를 정리한 상태였고, 신혼여행이나 예물 등등 전부 순조롭게 추가 계약이 진행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도 없고 속도 안 좋은 와중에 박람회 상담 사은품도 야무지게 챙겨 왔다.
이렇게 정말 얼레벌레 결혼식에 대한 견적을 내고 일단 한숨 자며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견적에 대해 주변에 물어봤더니 생각보다 정말 가성비 있는 견적이었다. 플래너는 돈 뜯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오히려 박람회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박람회 특전과 플래너 제휴 가격까지 하면 플래너 없이 진행하는 거보다 더 저렴했다. 실제로 결혼준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봤더니 다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견적 내보며 준비하면서 이런 편견이 깨져서 다들 플래너와 박람회를 모두 추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