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낯가리는 29살
2020.05.23
햇살에 비친 한강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예쁜 윤슬만큼이나 내 마음도 조그맣게 춤을 춘다. 연애 이상향을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한결같이 따뜻한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듣기 이전에도 혼자 수없이 많은 생각 끝에 도출해 낸 최선의 결론이었다. 29년을 살아오며 꽤 많은 연애를 했다. 뜨겁게 끓어 넘치는 사랑부터 우주에 정말 단 둘 뿐인가 믿어버리게 만드는 완전무결한 사랑까지. 하지만 그것들도 당도 최고 시점을 지나고 나면 결국 검은 반점으로 뒤덮여버린 바나나처럼 갈변되었다. 일 년이든 이년이든 시점만 다를 뿐 결국에는 서서히 멍이 생기고 문드러졌다. 조금 더 갈변된 사랑이 상대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사랑보다 따뜻한 온도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사랑.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노력과 배려가 필요한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4월 중순, 지인의 주선으로 생애 첫 소개팅을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 데다 지금껏 자연스럽게 알게 된 주변인들과만 연애를 해왔던 터라 소개팅이 쉬울 리가 없었다. 난생처음 본 사람과 단 둘이 밥을 먹으며 하하호호 이야기를 한다고? 나에게는 소개팅이 도전이자 모험이자 일종의 담력 테스트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한 마음도 생겼다. 나와 상대 모두 요청한 적이 없는 소개팅을, 그것도 나와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지인이 둘의 어울림을 확신하며 제안한 것에 대해서. 상대가 나의 운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십 대 때나 했을 법한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봄비 오는 금요일 저녁, 서둘러 퇴근을 하고 여의도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고 지하철을 타면서도, 여의도역에 내려 약속 장소에 걸어가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울렁울렁 쏟아져 나왔다. 안전함이 확보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만히 숨 쉬고 싶었다. ‘면접 보러 온 거 아니고, 귀신의 집도 아니야.’와 같은 이상한 주문으로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간신히 잠재우며 약속 장소로 발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소개팅이 이렇게 무서울 일이야? 이게 뭐라고!!’ 싶은 생각에 혼자 발끈해서는 ‘그래. 그냥 간단하게 부장님이랑 저녁 먹는다고 생각하자(?)’라는 하나마나한 각오를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예의’와 ‘배려’의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 필요한 정보만을 취합한 자기소개, 대화할 때 경청하는 자세, 과하지 않은 칭찬까지.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그의 긴장한 모습. 모든 행동과 말에 조심스러움이 깔려있었고, 여러 번 고민한 배려 덕분에 짧은 호흡의 긴장감은 적당히 늘어진 템포의 대화로 이어졌다.
와인을 곁들인 적당히 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보니 꽤 늦은 시간이 되었다. 바로 귀가하는 걸로 합의를 보고 지하철을 타자마자 그에게 ‘다음에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라는 문자가 왔다. 오, 빠른 피드백까지. 이불속에 들어가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쥔다. 간질간질하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어색한 감정에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이성의 노력까지 더해져 꼭 뽀얀 구름 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 뒤로 아직 놓지 못한 긴장감과 작은 설렘을 데리고 주말 ‘데이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오늘, ‘한결같이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는 나에게 “아직 서로 알아가야 할 부분이 많을 테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며 “나랑 만나자”는 담백한 고백이 되돌아왔다.
봄바람에 한강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간질거리는 마음을 손에 꼭 쥐고 “응”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앞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할 것이다. 크고 작은 날들을 걸어가며 ‘우리만의 룰’을 만들어가겠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차갑다가도 따뜻하고, 금세 뜨거워져버리는 예측 불가한 일상을 각자 살아간다. 일상의 온도와 별개로 우리는 늘 따뜻한 온도를 유지했으면. 하고 바라본다. 평상시에도 감정 기복의 폭이 지킬 앤 하이드 급으로 넓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번 연애에서는 소리 지르기 금지. 싸우다가 집 가기 금지. 화난 망부석처럼 입 다물기 금지. 가을아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