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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Jul 11. 2021

인류애가 증발하는 순간들

2020.10.09


일상에서 만나는 무수한 빌런들.

회사 빌런부터 지하철 빌런, 소음 빌런, 새치기 빌런 등 곳곳의 장소에 참 다양한 유형의 빌런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분노케 하는 유형은 유치원 때 배웠을 법한 기본적인 예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이다.


1)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요.

2) 친구들과 인사를 잘해요.

3) 차례를 지켜요

4) 밥은 소리 내지 않고 먹어요


쉬운데? 유치원 아이들 지키는  규칙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절차인가 보다.


일단 내가 최근에 만난 빌런들만 언뜻 떠올려봐도 금세 여러 명이 줄 세워진다.


1) 양치 빌런

얼마 전 그룹 내 타 계열사 마케팅팀과 협업해 처리한 업무가 있었다. 마케팅팀 담당자로부터 처리 완료 메일까지 받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 해당 계열사 이사님이 ‘미처리되었으니 확인해보라’고 재차 연락을 해왔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마음으로 해당 팀 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질책과 긴급함이 섞인 물음에도 느긋한 목소리로 “지금 출장으로 지방에 와있으니 당장 확인이 어렵고 ‘추후에’ 연락을 준다.”라고 했다. 심드렁한 말투에 치카치카 양치하는 소리까지 서비스로 들려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귀중한 양치시간을 뺏은 텔레마케팅 기계음 정도로 전락되었다. 다행히도 이 일은 해당 계열사 내 소통의 부재로 인한 해프닝으로, 업무는 깔끔하게 처리되었던 게 맞았다. 이 일로 사람이 어느정도 이상으로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도 안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내 핸드폰 속 그의 이름은 '치카 부장'으로 변경되었다.


2) 당근 빌런

방 정리를 하다 쓰지 않는 물건들 중 버리기엔 아까울 만큼 상태가 좋은 것들을 추려 중고마켓에 올렸다. 무료 나눔으로 분류해도 될 만큼의 가격(정가의 1/10 이하)으로 산정했으며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중 가장 빨리 연락을 준 사람에게 데님 스커트를 판매하기로 했다. 그녀는 평일 오전에도 저녁에도 시간이 없지만, 택배거래 말고 직거래가 좋다고 했다. 겨우 주말로 시간을 맞춰놨는데 갑자기 연락을 해서는 본인이 사는 동네로 올 수 없냐고 물었다. 안된다고 대답하자 그럼 주위에 옷을 갈아입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만나자는 거다. "치마 입어보시고 안 맞으면 구매 안 하실 건가요?"라고 묻자 "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헤헤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났다. 바로 거래 못한다고 답변하고 차단. 그 뒤로 중고거래는 하지 않는다.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지인들에게 주거나 그냥 버리는 게 마음이 편해졌다.


이 외에도 지하철 앞좌석이 비어 앉으려는 찰나 날 밀어내고 앉아버린 사람, 너무나도 당연하게 새치기를 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고개 까딱도 안 해주던 사람 등 각기 다양한 빌런들을 만났다.


또 다른 빌런을 만난 어느 날, 불을 끄고 방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기본 상식이 탑재되지 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기본만 지키면서 살면 세상이 곱절로 평화로워질 텐데. 생각은 기초교육에서부터 성악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지다가 정말이지 뜻밖의 결론에 다다랐다. 기본 개념을 벗어나는 이들이 유독 기억에 길게 남을 정도로 충격이라는 것은= '일상에 그만큼 상식적인 그리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빌런을 만날 확률을 계산해보자. 하루 동안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해서 다시 집에 돌아오는 데까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략 500여 명이라고 계산해보자. 그리고 SNS 등 온라인으로 만나는 이들 300여 명까지 하면 총 800여 명. 주말에도 외출을 해 비슷한 인원을 지나쳤다고 치면 800X7일=5,600여 명. 나는 월 22,4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보낸다. 약 22,400여 명의 사람과 인생의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는 동안 단 2명의 빌런을 만났을 뿐이다(평균 월 2명 빌런을 마주친다). 일상에서 빌런을 만날 확률 0.009%. 그러니까 나는 99.991%의 선량한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대중교통에서, 회사에서, 길거리에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배려를 보여준 이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세상에는 사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빌런이 더 돋보이게 된 것은 99.991%의 선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포커스를 어디에 두고 인생을 헤엄쳐가야 하는지 확신이 든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 그들이 간혹 나타나 검은색 물감으로 내 기분과 일상을 더럽힐 때가 있겠지. 그렇지만 다시 하얗게 묽혀 쓰면 된다. 그러면 된다. 다시 인류애 충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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