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 시인을 30년이 지나 다시 만나다, 박노해의 <다른 길>
언제였을까? 빛 바랜 종이 위에 거친 판화글씨로 만들어진 노동의 새벽을 읽고, 그 이후 마음에 다가온 묵직한 울림을 경험해 본 것은 아마도 대학교 신입생 때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 자신은 세상에 갓 나온 어린 동물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어, 시인이 들려 준 노동이라는 말이 마음 한 켠에서 무거운 쇳덩이처럼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으로 인해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매겨 줄 삶의 진정한 의미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간접적으로나마 사회적인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만든 경외스런 그 박노해 시인을 다시 만났다. <다른 길>이라는 사진에세이와 함께...
조금은 의외였다. 투사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노동자의 단결을 외친 그 시인이 사진 에세이를 펴냈다는 것은 그동안 시인의 행적을 알지 못하는 만큼 그를 과거에 알아왔던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노동의 새벽>을 거쳐 사노맹을 결성하고 '참된시작'과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는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아는 독자라면 조금은 이해되는 구석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국내의 다양한 노동 이슈거리를 마다하고 해외 빈민 노동자들의 삶을 담기 위해 대부분을 해외를 떠돌며 다닌다는 것에는 또다른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나 역시 시인의 행적을 궁금해 했고 <노동의 새벽>의 강렬한 이미지를 기대했던 만큼 어느 정도 실망감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을 국내외로 구분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인터내셔널이라는 거대한 힘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며, 노동으로 보이는 행위으 밑바탕에는 '사람의 땀냄새' 나는 삶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마침내 시인이 추구하고자 한 사진의 의미가, '다른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것 같기도 했다.
옛날이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을 하고, 혁명을 해야 하는, 적과 아군이 분명한 이분법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지만, 정치권력이 아닌 거대 자본에 의해 변질된 억압의 굴레 속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투쟁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애매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억압하는 제도로 받아들여졌을 때에는 아미 '자본'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 내가 올라탄 이후이니까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권력의 변화와 투쟁의 본질을 '사람'이라는, '노동하는 삶'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참된시작'이라는 시집을 펴냈을 때 이미 그런 분위기는 감지되었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디아, 티벳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여정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내몰린 사람들에게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발견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혁명해야 하는, 간접적인 선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나만의 생각일까? 오히려 현대에서 보이는 것처럼 투쟁의 대상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주먹을 휘두르는 투쟁 보다는 마음 속을 울림을 전달하는 잔잔한 혁명이 더 와닿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투쟁의 대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박노해 시인의 책이 다시 조명받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변화시키고 투쟁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내 마음속 공감대의 울림의 커지면 커질수록, 그 의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잔잔한 마음에 큰 너울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책....30여년 전 시작된 나의 고민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