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stin Sep 25. 2021

사람을 위한, 닫힌 공간 속 열린 생각

'碩果不食'의 교훈,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두 번째 읽다

몇 번을 읽어도 새것 같은 다른 책과는 다르게 <담론>은 독자가 책읽기에 들인 시간만큼 책 스스로가 자신을 허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손 때가 묻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만큼 책의 표지는 점점 낡아간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는 작은 차이가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올 때까지 이 책이 나와 동행한 이유 중 하나이다.


2주 하고도 3일..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더 걸렸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두 번 펼쳐 마지막 한 장을 덮을 때까지 걸린 총 시간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책 한 권쯤 2~3일이면 너끈하게 읽어주고 미흡하더라도 나름대로 글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리가 되곤 했는데 유독 선생의 책에서만큼은 그 이상의 지난한긴 시간이 걸렸다.

사랑하는 이에 빠져 다른 어떠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오롯이 집중한  연애 시절의 심미적 현상이 다시 일어난 것일까? <담론>의 글자 하나 하나는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다. 그것은 노학자의 인생이자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통찰력이며, 우리의 과오를 덮고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가치를 담은 수작이라고 감히 이야기 해도 좋다. 혼란한 우리 시대, 세대간의 갈등과 지역간의 갈등, 인종간의 갈등을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는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 선생은 어려운 내용의 해설자이자 전달자로서 우리 앞에 서 있으니, 어찌 경외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논어>, <맹자>는 물론 '노자'와 '묵자', '장자',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선인들의 고전에서 얻는 삶과 자연의 순리는 경이롭다. 오늘 날의 해결 불가능한 모든 일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고도 남을 통찰력 있는 서술에서 우리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 깨닫는다. 그것은 서로간의 대비와 관계에 의한 사고의 다양성의 표현이며 그 존재가치로서 배워야 할 지식의 총체이기도 하다. 수 천년 전 인간의 사고양식이 지금보다 더 다채롭게 존재했었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 거기에 인간의 사상과 정신도 분명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순방향적 경쟁관계'를 이루면서 발전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만든다. 


사형에서 무기징역, 그리고 석방에 이르기까지 걸쳐온 선생의 인생과 사상을 누군가가 재단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할 근거는 없다. 진영 대립이 만연하고 사익에 편승한 폭력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선생이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의 길은 무한대로 반복되는 신체적 구속으로 연결되었고 한 평짜리 감옥의 공간적 제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사회를 아우르는 사고의 유연성과 확고한 인식의 틀은 더욱 강력한 무언가를 얹혀진 선생의 과거 보다 더욱 공고한 새로운 사상적 틀을 완성시켰다. 그 시작은 나에 대상으로 한 '자기성찰'이었고, 타인을 나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연결시켜 사회의 동인으로서 성장하는 발전적 태도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선생의 초점은 사람에게 맞춰진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나무야 나무야> 그리고 <강의>로 이어진 사상의 표현 그대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객관화된 문구 하나 하나에서 우리의 상황과 관계를 맺으려는 관찰의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선생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바로 '담론적 사고'의 힘이다. '개별적'이지 않고 '통합적'이고, '일부'가 아닌 '전체'를 위한 것.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사람이 제일 중요한 이유가 되고, 모든 일의 목적은 '사람'에게 향해야 한다는 <담론>의 결론과 맞닿아진다. 


머리 속으로 한 번 그려내는 수준과 머리로 읽는 독서로만 <담론> 전체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한 번을 읽고 두 번을 마쳐도 선생이 수 십 년간 이해한 '관계의 힘'을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에 대한 성찰과 주변에 대한 이해, 그리고 궁극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에 수줍은 만족을 느낀다. 선생이 강의 초반에 전한 것처럼 '여러분들의 몫에 충실한 독서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담론>의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내가 아직... 이 책을 감당할 만한 인문학적 사고의 틀이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책은 곁에 두어야 하고, <담론>은 두고두고 넘겨 보기 위해 마음속 한 켠에 담아 놓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지금과 같이 만연된 갈등이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시기에 '석과불식'의 교훈을 되새기며 사람 중심의 세상을 상상해 본다.




* 碩果不食(석과불식)의 교훈

- 큰 과실(果實)은 다 먹지 않고 남긴다는 뜻으로,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子孫)에게 복을 끼쳐 줌을 이르는 말.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는 대신,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워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고자 하는 일. 이것이 지금 우리 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희망의 언어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행복의 기원설'에 대한 자기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