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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n Sep 28. 2021

시간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술

'중년'의 상품화와 역할, 페트리샤 코헨의 <중년이라는 상품의 역사>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라는 경제 이데올로기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침투해 있는지 다시 한 번 를 깨닫게 된다. 맑스의 자본론이 '거래'라는 상호작용에 의미를 두고 생산주체들의 투쟁을 예측했지만, 수 세기가 지난 지금 자본주의라는 울타리는 맑스의 순수한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그가 예측한 영역도, 공간도, 시간도 가리지 않고 일상 속을 지배하고 있다.


'거래'라는 개념이 '공간'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어, 생산 우위의 요소들을 교환하면서 이윤을 얻는 수출과 수입에 가까운 개념이었다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시간'을 이용해서 상품을 판매하는 이윤전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새로운 버전의 신제품을 주기적으로 출시하여 소비를 은근 부추기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못 사게 되면 행여 뒤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가지게 만드는 암묵적인 강요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자본주의은 제국주의의 돈벌이인 공간 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간'을 팔아먹는 이데올로기인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한 대목을 언급하면서 놀랄만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한 세대 - '중년'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허구의 개념이며, 자본주의는 벌써 인생이라는 시간의 길위 마저도 소비의 덫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사냥꾼과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중년'의 대열에 오르는 순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위치에 걸맞는 소비적 행동을 보여야 하고, 세대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처럼 '중년'의 돈 지갑을 쳐다보는 젊은 세대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 구조로 조작해 버린다.


'중년'이라는 개념은 원래 존재하지 않은 말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 인식의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말이다. 그리고 '중년'은 생물학적 또는 정신분석학적이건 간에, 누군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적 이상주의 또는 소비주의의 산물로 존재하게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소비의 원천인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높은 세대임과 동시에 의료, 관료, 교육 부문에서 막대한 소비력을 자랑하는 세대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중년'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들이 동일한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년'의 세대가 경험지식의 측면에서 원숙미를 발산하며 젊은이로 하여금 미래를 향하게 하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순기능을 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되었든 간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를 멸망에 빠트릴 정도의 실수를 저지른 이후, 중년은 그들이 담당해야 할 순기능보다는 자본주의가 바라보는 대로 순응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노령화에 따른 의료 산업의 발달, 젊음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섹스산업과 성형산업, TV 속 끈질기게 틀어대는 다양한 광고물, 그리고 현재의 영화를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자기개발에 이르기까지, '중년'에 대한 자본주의의 집요한 공략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젊음에 대한 선호도를 자극하여 '중년'의 현재 가치를 매도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비 능력만을 강조함은 물론 '중년' 스스로도 어는 순간부터 나이가 든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알게 모르게 더 젊음을 유지하려하고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이 지금 시대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그들이 담당해 온 역할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사회변혁을 이끌지만 중년은 사회 안정을 가져온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년' 스스로도 소비의 주체에서 벗어나 사회 참여의 주체로 '다시 한 번 더'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앞으로 '중년'의 모습은 전혀 다른 환경속에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년은 이미 특정세대를 일컫는 말이 아닌 스스로 창조적 기능을 가진 능동적 세대로 변화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과거의 역사에서 보아왔듯이, 현재의 소비적 산물로서 창조적,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유연성을 가지고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세대로 탈바꿈하고 진화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소비의 주체로서 '중년'의 개념은 잊혀지는 것이 맞는 것일 수 있지만, 자본주의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생에서 축적된 경험, 기술, 열정, 만족, 창의력과 같이 '중년'만이 가지는 무언가가 이 사회를 위해 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인생이라는 세월의 흐름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의 본질을 찾아가며 변화할 수 있을까? 나이 50에 들어선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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