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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n Oct 18. 2021

관조하는 자세로 일상 들여다보기

5년 전 시간으로 돌아가 나를 다시 보게 만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2021년을 맞이한 지도 9개월이 훌쩍 지났다. 이미 몸과 마음은 한 해의 마지막에 와있는 것 마냥 숨이 차오른다. 코로나 덕분에(?) 몸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적었지만, 세상의 일들을 제것인 처럼 마음이 설치고 다니고 여기 저기 얽히다 보니 심신이 피곤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조급함과 답답함이 함께 짓누르는 무거운 마음은 몸 마저 녹초를 만드는 기술이 있나 보다.


2016년 읽었던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다시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앞서 말한 나의 힘빠진 심신에 대한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5년 전의 책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전거 여행을 소재로 삼아 일상에 대한 통찰력과 해석력을 배우며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어렴풋한 기억이 다시 책을 들게 만들었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주위의 작은 것들에서 깊이 있는 글들을 뽑아낼 수 있는지, 과학자만이 물질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과학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적 표현력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일상의 것들에 대한 근본을 다소곳이 설명해 내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밥, 돈, 몸 그리고 길과 글은 어찌보면 흔한 단어지만 그 의미에서는 사뭇 다르다. 밥과 돈, 몸이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라면, 길과 글은 집착으로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에 대한 것들이다. 물론 그 하위 단에 있는 소재들은 모두 평범하게 주변의 것들이어서 소재 하나하나 만을 놓고 볼 때에는 책은 오히려 물리, 생물, 화학과 같은 과학 서적에 가깝다. 물질을 해체하여 그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는 과학처럼 말이다.


사물에 대한 '관조', 가볍지 않고 헛되지 않은 진중함이 녹아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저자의 책은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보면서도 못보는 것들을 선명하게 표현해 준다. 가끔씩 같은 공간속에서 존재하는 일상의 것들에게서 소름끼칠 정도로 정제된 글밥들이 뒤섞여 새로운 힘을 창조한다. 세월호, 돈, 소방관, 여자, 목숨 등.. 고난과 역경의 폭력을 고스한히 받아내어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기어코 승리자가 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하염없는 무관심에 절망하게 만들고 또 반성하게 만드는 것은 이 책만이 가지는 매력이다. 근래 지면을 뒤덮고 있는 비난과 구호 일갈인 정치적인 선동과 진실을 외면하는 글쟁이들의 현학 또는 게으름과는 극명한 차이다


김훈의 책을 항간에는 '관념적 언어로만 가득찬 글'이라 폄하하는 것을 가끔 보아왔다. 그래서 그의 말장난 아닌 말장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이상주의'에 가깝다는 표현도 본 것 같다. 최근에는 새롭지 않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에 쓰였던 문장이건 간에, <라면을 끓이며>를 다시 읽어 내려가는 내내, 그의 관조적 능력은 우리의 생활적인 소재와 만나 한층 어우러진 하모니를 그려낸다. 그게 그만의 스타일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사고의 공간은 충분하다. 다만 모티브만 던져둘 뿐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결코 방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은 실재와 만나 더욱 리얼리즘을 얻는다고 할까? 그렇지 않으면 김훈이 자전거를 끌고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며 세상 도처를 돌아다닐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만의 한계일지라도 말이다.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인간이 표현 가능한 언어로서 해체하고 통합하는 묘미는 나의 언어적 멘토인 박웅현이 말처럼 '들여다 보는 능력'에서 만큼은 최고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글자 밑 연필 자국이 자욱한 책으로 남아 있는 <라면을 끓이며>는 나에게 선사한 김훈의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눈 뜬 장님'처럼, '귀 연 귀머거리' 처럼, '입 벌린 벙어리'처럼 행세하지는 않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가 하는 되돌아 볼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한다는 것은 어떤 비판에도 희석되지 않을 책의 가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거창한 이상과 무질없는 생각들로 가까운 것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2021년은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마무리 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외부의 조건 때문이라 하더라도 마음의 조급함은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고 잃었던 것을 만회하려는 조바심으로만 가득하다. 5년 전 너무 몸이 너무 바쁜 이유로 일상을 놓쳤던 반면, 지금은 마음이 너무 급해 일상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5년 전의 책으로 다시 2021년에 관조하는 법을 배우게 되니, 어쩌면 일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고 있었나 보다. 그저 부유물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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