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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n 09. 2020

약자의 폭력은 가시화된다

거대한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약자들은 일상적으로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위험이 나에게 일어나리라는 공포, 그리고 그 위험으로부터 사회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으리라는 공포. 이번 시위 이전에도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 dear white people>을 통해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가장 큰 공포 중 하나는 경찰의 손에, 공권력의 손에 살해당하고 가해자는 처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공포이다. 약자들의 공포는 실제로 벌어지며, 실제로 잘 처벌받지 않는다.


만약에 사회가 당신을 구해줄 생각도 없고 보호해줄 생각도 없다면, 당신 혹은 다른 약자가 똑같은 문제로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지배층은 그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은 좌절 혹은 분노일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순응 혹은 저항일 것이다. 저항의 외양은 폭력성을 띠기도 하며, 그 폭력은 자신을 향하기도 하고(주로 연대를 구하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이길 승산과 희망이 없으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외부를 향하기도(주로 집단적 형태로) 한다.


때문에 당연히, 약자의 분노는 강자의 그것보다 눈에 잘 보이게 폭력적이다. 우리의 눈에는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만 보이지, 이를 있게 한 거대한 구조적인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과격한 미러링을 하는 여성들만 눈에 보였지, 이를 있게 한 거대한 카르텔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분노는 주로 약자들에게서 더 나타날 수밖에 없다. 강자는, 자신의 위력을 의사에 따라 행사하면 되니까. 노예제 하에서 분노하는 것은 노예이지 주인이 아니다. (약자를 겨냥한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는 분노라기 보단 분풀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약자들의 분노와 폭력성은 의도적이다. 우발적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아버지에 저항하게 된 어린 아들을 생각해보자. 어린 아들이 그보다 힘이 센 아버지를 해했는데, 그것이 우발적일 수가 있는가?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써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계획과 의도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자의 약자에 대한 가해는 우발적일 수 있다. ‘이 사람이 약자라는 계산’은 의도적인 것으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약자는 더 높은 형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사법부라는 게, 저런 권력의 불균형이나 맥락을 이해하라는 측면에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기계적으로 적용해선 안 되는 부분은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성범죄 가해자를 용서하는 데에는 재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약자가 폭력에 접근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의도와 계획을 수반하게 된다. 내 앞에 있던 흑인이 경찰에게 죄 없이 살해당했을 때, 아무런 조직도 하지 않고 나 혼자서 그 자리에서 ‘우발적으로’ 경찰에게 저항할 수 있나? 당연히 이 과정에서 더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약자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용히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약자들의 저항은 눈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때때로 상상한다. 분명 독립운동을 하던 시대의 무장 독립운동 또한 순탄하지 않았으리라고. 물론 인터넷이 발달해서 누구나 여론을 형성할 수 있고 계급적 구분이 비교적 덜 뚜렷한 지금과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겠지만, 누군가는 폭력적인 수단을 택한 데 대해 비난했을 것이 확실하다. 친일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신문에서 조선인이 테러를 했다는 소식을 보면서, ‘그래도 폭력은 아니지’라고 조언한 지식인들이 꽤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폭력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폭력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그럼 가게는 왜 불질러’에 대해서 가게 주인들이 다 참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꼭 보상받으셨기를 바란다)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다만 약자의 폭력을 볼 때 왜 그렇게 불리한 지위에서 싸우기를 택했는지를 한 번쯤 멈추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뒤에 얼마나 더 큰 폭력이 있었고, 어떤 맥락에서 약자가, 투쟁의 도구로 폭력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제일 쉬운 가까운 예시는 미러링이다. 그들은 정말 의도적으로 폭력성을 보인다. 근데 이를 마치 권력 전복 혹은 강자에 대한 억압의 증거로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촛불 시위를 통해 평화롭게 정권을 바꾸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 평화롭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만약에 사법부가 다른 판단을 내리고, 계엄령이 내려져 평화로운 시위가 불가능했다면 아마 다른 가능성을 검토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평화가 좋다. 영원히 누군가를 해하는 범죄도 국가 권력도 없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피 흘리는 일은 헌혈할 때뿐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다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거대한 강자의 구조적 폭력(구조적 폭력의 끝에는 생생한 물리적 폭력이 수반된다)에는 눈을 감고, 약자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저항 과정에서의 폭력에만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나노 단위로 비난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러한 비난은 보통 폭력적 일화에 대해서만 비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저항 운동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약자에 대한 폭력이 자행된다면 이것 또한 우리는 고려해보아야 한다. (ex. 흑인 인권 시위 과정에서 호텝 문제, 동양인에 대한 공격 등) 하지만 이 또한 그 분야에 한정하여 분석하여야지, 다짜고짜 해당 운동 전체에 대한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를 다룰 때 오직 불 탄 매장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쓰게 되었다.


세상이 기울어있다면 우리는 시선을 기울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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