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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n 22. 2020

'결혼하지 않음'이 두려운 당신에게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구체적인 환상들

말마따나 학창 시절은 하나의 엄연한 '시절'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싱글로 사는 기간을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처럼 생각한다. 결혼을 늦게하는 추세인 요즘은 그 기간이 아주 길어져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 기간을 '진짜 인생'의 서막처럼 여긴다면 긴 기간 동안 인생을 유예하면서 사는 셈이 된다.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중에서


어디선가 소름돋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많은 남성들이 자취하면서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떼우거나 대충 먹는 것은 '언젠가는 결혼해서 아내가 제대로 차려줄 것이라는' 기대가 무의식중에 있어서 ('일부 남성' 제외) 라는 글이었다. 나 또한 은연중에 결혼을 내 인생에서 어떤 결론 중 하나처럼 생각하는 (혹시 프린세스 메이커의 영향인가?) 경향이 있긴 했지만, 이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수많은 남성들이 자취를 하면서 대부분 외식으로 식사를 떼우거나, 잘 챙겨먹는다고 해도 반찬을 사와서 먹는 정도로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여성들도 많지만, 그런 경우 '결혼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거다'라는 기대 속에서 음식을 차리는 것이 자기 자신이었다(나도, 원룸이 아닌 집에 살면 요리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면 가사 도우미를 쓰겠다고. (남편이 차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여성은 없었다) 


하여튼 결혼은 우리에게 '성인'이 되었다는 환상, 결혼을 해서야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점에서 구체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 



1. 주거


내 생각에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거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의 저자 김진아님은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꿈꾸던 것은 사실 결혼이 아니라 아파트였노라고.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결혼의 이미지는 대충, 임시 주거라고 여겨지는 원룸을 전전하다가 결혼을 통해 아파트,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방은 딸린 빌라를 죽을 힘을 다해 마련해서 '정착'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실 우리 세대가 노동 임금으로 아파트를 사는 것은 일부 소수 대기업 사원들이 대출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한데, 대부분 양육자들의 도움과 대출을 껴서 받는다. 사실 없었던 능력이 추가로 생겨나는 건 아니고 결국 기존의 자원을 빡쎄게 긁어서 두 사람이 모았다는 정도의 시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결혼해야 돈을 모은다' 같은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런지. 결혼해서 월세방을 전전하지는 않을테니 (hopely..) 주거의 안정을 획득함으로서 돈이 모인다는 의미일 것이고, 주거 안정은 곧 결혼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만약 시부모님에게서 돈을 받았다면 그것을 대가로 당신 인생이 갈려나갈 수도 있다는 점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돈이 없는 데서 뿅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돈을 두 사람이 긁어모았을 뿐이라는 점도.


2. 경제적 능력


<B의 일기>에도 정말 정확하게 집어낸 부분이지만, 애초에 '덜 버는 사람이 집안일 하지'는 말이 안 된다. 그것은 99.9%의 확률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입사 동기와 결혼을 했더라도 당신은 남편보다 많이 벌 수 없다.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226652

이 사실은 한국이 OECD 여성 남성 임금격차로는 측정 이래로 항상 부동의 압승을 해오고 있다는 통계자료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926151300004

이렇듯 여성의 경제적 능력을 항시 위협하는 사회에서 '덜 버는' 여성들에게 결혼은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남성과 결합하여 안정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선택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당신이 결혼을 통해 보장받는 경제적 보상(남편의 소득)은 항상 그렇듯 무료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가사노동을 검색해보자) 하지만 가사-돌봄 노동은 경력으로도 인정 안 될 것이고 사실 당신의 직업상 경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육아까지 합한다면 거의 100%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심지어, 이렇듯 불평등한 구조 하에서도 계속해서 존재해온 '여성 가장'의 이야기는 감춰지고 지워진다. 어색하다면 한 번 떠올려보자. 그 옛날 가부장제가 공고하고 남성의 경제적 지위가 더더욱 절대적이던 그 시절에도 '술주정뱅이 아빠'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삯바느질하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에 소리만 지르는 배경. 더욱 그 때보다는 여성이 돈 버는 모습이 (환경은 열악하지만) 일반적인 이 사회에서 여성이 사실상 경제적 가장 노릇까지 짊어지고 있는 집이 없을까? 나는 사실 꽤 많이 목도했다. 결혼한다고해서 여성에게 그런 경제적 안정을 완전히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내 눈앞에서 나를 아껴주는 '믿음직한' 남성이 그런 면에서 날 배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남성들도 자의로 실업하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이후에 여성이 돈을 벌겠다고 노동 시장에 자신을 내놓았을 때, 당신은 날개가 부러지거나 상처입었을 가능성이 결혼을 통해 아주 높아졌을 것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74408914


3. 자식을 남겼다는 보람


주거나 경제적 문제 외에도 결혼을 통해 '사람 노릇'한다, '완성'된다는, 무언가 성취했다는 그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식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사는 게 미친듯이 비참하고 고되더라도 사람은 항상 희망을 갖고 싶어한다. 그 중 하나가 자식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뭔가 나는 자식을 키워냈다는 성취감. 난 사실 이 면에서 수많은 어머니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정말 자식을 '어느정도로라도' 키우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걸 해낸(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머니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u_uo&logNo=221892348728

하지만 나는 첫번째로 그 대가가 매우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가능성은 아이를 키우면서 꽃 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렸거나 꽃 피우더라도 그 몇 백배의 노력을 요했을 것이다. 내 가능성을 위한 탐색과 치열함을 포기하고 그저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은 언뜻 쉬운 선택지로 보일 수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사회가 여성인 당신의 성취를 어렵게 만들어, 자식에게 희망을 건 양육자로서의 길을 응원하고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두번째로 나는 사회가 '어쨌든 자식을 키워냈으니'라는 말로 많은 사람들을 마치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희망이 있고 삶이 완성되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분명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긴 한데, (양육의 환경이나 질에 상관없이) 어쨌든 자라기는 했다면 이는 정말 외부에서 보기에는 좋은 눈속임이 될 수 있다. 평생 혼자 가난하게 방구석에서 늙어가는 삶보다 똑같이 평생 가난하게 방구석에서 살면서 자식을 낳는 삶을 사회는 더 장려한다. 그렇다고 미친듯이 가난하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생명에게 그 고통을 나눠지게 하는데도. '혼자'에 대해 발작하며 이러한 혼자가 빈곤과 합쳐졌을 때 최악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며, 그 와중에 '자식이라도 낳아야' 제대로 된, 바람직한 삶이라고 주입한다. 과연. 우리는 혼자(정확히는 '후손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없앨 필요가 있다. 그것이 덜 완성된 삶은 아니다. 


+ 그리고 자식이 당신 이상의 성취를 이뤄낸다면 그것은 시대가 변한 탓이며 생각보다 자식은 부모와 비슷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예외의 가능성이 있다면 딸이 결혼 대신 비혼을 선택하는 것..? 삶이 좋아진다고 보장은 하기 어렵지만 다른 모습으로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는 있겠다.) 이제 개천에서 절대 용이 안난다는 사실은 알 때가 됐다. '왜, 우리 애는 공부 잘했는데!' 공부는 진정 이 사회의 눈속임일 뿐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유일하게 수능 성적으로 탈 수 있는 대기업 공채라는 등용문은 문 닫은지 오래고(문과 여성이라면 더더욱 포기하시라), 온전히 공부로는 유학과 대학원 이후의 커리큘럼이 그 결과를 결정할텐데,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진정한 돈 싸움이다. 공부만으로는 자식에게서 양육자 수준의 삶, 그 이상을 꿈꿀 수 없다. (예외적인 경우도 당연히 있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절대 아니다)



결혼하지 않는 게 두려운 당신을 위한 구체적 실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내 주장의 핵심은 '모든 건 내가 책임진다, 절대 결혼하지 마!'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결혼해야 한다는 세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물론 결혼을 잘 할 수도 있다. (가사-감정-돌봄 노동 분담을 평등하게 하면서, 서로의 성취를 독려하는 관계) 판단과 결정은 항상 당신의 몫이다. 다만 아래의 경우는 정말 꼭 피했으면 좋겠다.

- 상대가 좀 불만족스럽지만 내 나이가 많아서 (더 나은 남자가 없을 것 같아서) 결혼해야겠다.

- 친구들도 다 결혼했는데, 나도 결혼해야겠다

- 그냥 결혼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결혼해야겠다.


불안감이 막연하게 든다면 구체적으로 아래의 활동들을 추천하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비혼) 여성 커뮤니티를 알아본다.

이성과의 연애를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 두고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부수적인 관계로만 보지 않도록 노력해본다.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처럼 여성들의 우정을 다루는 작품들을 보면 동성 간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은 당신의 몫이지만 관련된 도서를 읽어본다. 결혼의 좋은 점은 온 사회가 주입하고 있으니 못 들어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추천목록: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황선우,김하나)>
<지속 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신예희)>
: 동시대의 비혼 여성들의 삶을 볼 수 있음
<결혼 고발(사월날씨)> :동시대 기혼 여성의 의견을 들을 수 있음.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김진아)> : 동시대 탈혼 여성의 삶 이야기 및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
만화 혹은 에세이 :
웹툰 <B의 일기(작가1)>, <며느라기(신수지)>,<하면 좋습니까?(미깡)>

- 유튜브: <듣똑라(듣다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 <하말넘많> 같은 매체를 활용해서 여성을 위한 경제, 주거 , 세무 상식 등을 공부하여 막연하게 혼자 사는 데 대한 두려움 없애기


여성은 결혼하더라도 고독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성의 수명이 더 길기도 하고, 여성일 경우 장기적으로 투병하거나 심각하게 아플 때 배우자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남성보다 더 높다고 한다.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에 있어 결혼은 여성에게 보험의 기능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많은 남성들도 '여성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이제 결혼은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며, 사회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지도록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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