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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ㅇ혜 Oct 13. 2022

하이데거의 불꽃 정신

하이데거는 <언어의 도상>에서 정신을 불꽃으로 이해하며 시인의 언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에서 ‘정신적(geistlich)이란 정신(Geist)의 의미 안에 있고 정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정신의 본질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통용되는 정신적이란 종교적인 면 즉, 성직자 및 교회에서 말하는 정신적 상태와 연관해서 한정해 버렸다. 하이데거에서 시인이 말하는 정신은 기독교적 종교성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정신과도 구별된다. 플라톤 이래의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정신은 물질과 대비될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인 정신이 감각적인 물질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 정신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성적인 것), 지적인 것이라면 물질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 충동적인 것 정도로만 간주된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정의할 때 거기에는 이미 정신(이성)과 물질(육체)의 이분법 및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가 전제된다. 그런데 시인은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하이데거에서 시인은 정신의 본질적 의미를 근원적으로는 불꽃으로 이해한다. 불꽃은 스스로 불타올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며 경악케 하며 당황 하게 한다. 불꽃은 모든 것을 비추어 밝게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는 동안 모든 것을 순백의 재로 삼켜 버리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불꽃이 시인에게는 정신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불꽃으로서의 정신이 공기, 바람, 숨결 등을 뜻하는 psyche 혹은 pneuma 등과 하등의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꽃으로서의 정신이 스스로 불타오르기에 그 불꽃은 바람 앞에서 명멸하는 것, 즉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불꽃으로서의 정신은 psyche 혹은 pneuma 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사태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시인 트라클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그로데크>에서 ‘정신의 뜨거운 불꽃’에 관해 말한다. 정신은 불타오르는 것이며 또한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다. 트라클은 정신을 프네우마(Pneuma)로서, 즉 영적인 것으로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꽃은 스스로 불타올라 깜짝 놀라게 하며(몰아내며) 경악케 하며  당황하게 하는 그런 불꽃으로 이해한다. 불타오른다는 것은 작열하면서 빛난다는 것이다. 불타오르는 것은 모든 것을 비추어 밝게 빛나게끔 할 수 있는 또한 그러는 동안 모든 것을 순백의 재로 삼켜 버릴 수 있는 그런 탈자(脫自. 스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뛰어넘거나 벗어남)적인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씨앗은 영혼이다. 영혼에 해당하는 독일어 Seele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psyche, pneuma, anima 등으로 소급되듯, 영혼은 생명의 숨결 따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영혼을 가능하게 하는 자로서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은 불꽃이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에 바람 앞에 깜박이는 숨결도 가능하다. 정신은 영혼을 불어 넣는 자가 된다. 그런데 정신은 양면성을 갖는다. 불꽃으로서의 정신은 한편으로는 주변의 것들을 두루 비추어 밝게 빛나게 함으로써 전체를 하나이게 하는 통일적인 부드러움의 가능성을 지녔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것을 파편으로 해체하여 순백의 재로 화하는 파괴적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정신은 영혼을 선사하는 것이다. 정신은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혼은 정신을 지키는데 아마도 영혼이 없다면 정신은 결코 정신일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으로 정신을 지킨다. 영혼이 정신을 성장 시킨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정신과 물질(혹은 육체)의 이원론을 전제한다. 여기에서는 악의 기원이 대체로 물질 혹은 육체로부터 설명된다. 그러나 시인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넘어서 정신을 사유한다. 시인이 사유하는 정신은 육체에 대립하는 정신이 아니다. 즉,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이나 숨결 따위가 아니라 그런 것 까지를 모두 가능하게 하는 스스로 불타오르는 불꽃이다. 악은 물질이나 육체로 부터 발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과 구별되는 정신으로부터 발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악의 본질적 장소는 근원적 의미에서의 정신, 즉 불꽃으로서의 정신이 된다. 그것도 불꽃이 갖는 양면성 중 파괴적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불꽃은 부드러운 것과 파괴적인 것의 가능성 안에서 현성한다. 그리고 바로 불꽃으로서의 정신이 초래하는 이러한 파괴와 갈등과 분열 속에 악이 존재한다. 즉, 악은 항상 정신의 악인 것이다. 

신과 인간(영혼), 하늘과 대지가 하나로 어울리던 사방세계(하이데거에서 본연의 세계란 하늘, 땅, 죽을 자들인 인간, 신적인 것들이 각자의 고유함을 견지하는 가운데 하나로 어울리면서 밝게 열리는 사방으로서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존재의 진리가 비대상적으로 머무는, 존재의 진리를 인간본질에 접근시켜주는 열린 장이다)로부터 떨어져 나와 황량한 대지위로 추방된 자가 영혼이다. 그러기에 영혼은 고통속에 있다. 영혼의 본질이 정신이라면 정신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정신에 의해 고통속에 태어난 자가 영혼이 된다. 따라서 영혼에 의해 생명을 얻은 모든것은 고통속에 존재한다. 살아있는 모든것은 고통스럽다. 황량한 대지위를 방랑하는 영혼이 고통을 고통으로서 이겨냈을 때 고통은 승화된 고통, 참된 고통, 거센 고통이 된다. 이러한 거센 고통속에서 영혼은 스스로를 파괴한 정신의 본질을 회복한다. 그 정신은 순순한 정신을 의미한다. 순수한 정신은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악의 정신을 극복한 부드러운 불꽃이다. 따라서 순수한 정신의 불꽃의 본질은 하늘과 대지 그리고 신과 인간을 하나로 결집하는 힘이 된다. 결집하는 힘으로서의 순수한 정신은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다.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란 살만큼 살다가 죽은 퇴락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자기의 본질을 회복한 인간을 의미한다.     

드라클이 ‘대지의 나그네’로 묘사한 영혼은 사방세계를 구성하는 4자 각각이 자신의 본질을 향해 해방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은 현대 자연과학적 기술시대의 삶의 방식을 극복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의 본질적 사명은 원초(原初. 일이나 현상이 비롯되는 맨 처음)로 귀의 하여 자신의 본질적 안식처를 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방 세계를 새롭게 복원하여 사방 세계를 구성하던 사자(四者), 즉 하늘과 대지, 신과 인간의 원초적 공속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초적 공속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명체 서로간의 인내이다. 즉 생명체 상호간의 인내의 조화가 생명체의 공속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상호간의 인내의 조화에 기여하는 쓸모로부터 선(善)의 개념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선은 모든 생명체가 이미 고통속에 존재하므로 고통속에서의 선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고통은 이중적 대립 구조를 갖는다. 영혼이 고통을 고통으로서 이겨낼 때 영혼은 고통이 승화 된 순간을 맞이한다. 이제 영혼은 위대한 영혼으로서 성스럽게 빛나는 저 원초를 관조(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봄)함으로써 비로소 하늘과 대지, 신과 인간을 두루 비추어 그것들을 밝게 빛나게 한다. 다시 말해 영혼은 자기 주변에 함께 있는 것들을 자기의 방식대로 탈은폐 한다. 진리의 본질은 탈은폐(숨김과 감춤 없이 밝게 드러나 있다는 뜻으로 진리라고 사유 된다)이다. 서구 전통적 형이상학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 혹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진리의 본질로서 규정하나, 이러한 통상적 진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존재자의 탈은폐(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으로서 이해된 자유)가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즉 위대한 영혼이 존재자를 탈은폐하는 사건은 진리의 사건이 된다. 이 진리의 사건 안에서 존재자는 비로소 존재자로서 참답게 존재하게끔 된다. 살아있는 영혼은 고통 속에 존재하나 이 고통을 이겨낼 때 참된 것 그 자체가 된다. 


“영혼을 갖게 된 모든 것은 위대한 영혼의 근본 특징에 상응해서 스스로는 고통스러우나 선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이러한 방식으로만 참 다운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이 갖는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생명체는 자신과 함께 거기에 있는 것을 자신의 그때마다의 방식대로 은폐하면서 탈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무어(G. E. Moore)는 선이란 단순하고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선’과 ‘선한 것’은 구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선한 것’은 그 예를 들어 지시할 수도 있으나, ‘선’은 단순한 관념이므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거나 논리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선’의 의미는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선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善)이라는 말은 일상적 사용에서뿐만 아니라 이것에 관련한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추궁하는 철학이나 사회학에서도 매우 다의적이다. 그러나 선(善)을 문제 삼으면서 기독교신 학에서의 bonum(좋음), 영미사상계에서의 the good이라는 전 의미 영역을 시야에 둔다면 이것은 자칫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의 문제는 좋음 일반이 아니라 도덕적인 좋음, 즉 착함에 국한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즉 윤리도덕을 바로 윤리도덕이게끔 규정하는 한에서 선은 윤리도덕의 본질을 이루는 가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선이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의식 작용을 그 성격에 따라 지(知), 정(情), 의(意)로 분별하여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진(眞), 선(善), 미(美)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가치 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하여 악은 선의 반(反)가치로서, 진에 대한 위(僞)나 미에 대한 추(醜)와 마찬가지의 것이다. 가치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고 반 가치란 우리가 회피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은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가치이고 악은 우리의 행위에 들어있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행위를 통해 제거해야만 하는 반 가치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은 당위(當爲)적 가치이고 인간 행위의 당위적 규범을 윤리 또는 도덕이라고 일컫는 한에서, 선은 윤리 규범의 가치인 것이다.     

진리가 인식의 참 가치라면 선은 실천행위의 참 가치이다. 인식을 참 인식이게 해주는 진리를 우리는 논리적 사고나 파악하고자 한 사태를 제대로 드러내는 알맞은 언표(言表)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진리는 정합적인 사고에만 있을 수 있다’, ‘진리는 인식과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고 진리를 규정 한다’(진리의 의미) 이런 정도의 규정으로 진리의 의미를 얼마만큼 드러낼 수 있다면, 선의 의미에 관해서도 이런 수준의 규정은 가능할 것이다. 

대상을 지향하는 경우에도 인식은 대상을 단지 표상할 뿐 그 인식작용 자체가 대상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행위는 대상에 관계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내용을 가진 인식은 반드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하는 반면에, 행위는 현재하는 것을 극복하거나 아직 현재하지 않는 것을 현존하도록 하려는 작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식이나 행위, 모두 우리 인간 의식의 활동이지만 앞의 것을 좁은 의미에서의 의식(意識)작용, 뒤의 것을 의지(意志)작용이라 구별하는 것이다.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행하는 것은 다르다. 무엇인가의 행함에는 대개의 경우 앎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또한 앎 그것이 바로 행함은 아니다.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 그대로, 있는 것을 있는바 그대로, 있을 것을 있을 그대로,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있는가를 관조하는 인식과는 달리, 현재 있지 않은 것을 있도록 하는 행위는 의지적으로 무엇인가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실행(實行) 내지는 실천(實踐)이다. 이런 실천적 행위로서 대표적인 것이 노동(勞動)행위와 도덕행위이다. 노동행위 또는 도덕행위가 우리 인간의 실천적 행위로서 무엇인가의 실현(현실화)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전자가 사물과 관계하면서 사물 내지 물품의 가치(價値. 品格)를 높이려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가치(人格)를 높이려는 것이라고 구분해 볼 수 있다. 도덕행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이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천 행위 중에는 교육행위 같은 것도 있다. 따라서 인간간의 실천 행위가 모두 도덕행위는 아니다. 도덕행위는 인간 사이의 실천 행위 가운데서도 선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윤리도덕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사람의 행위를 사람답게 해주는 원리라고 한다면, 도덕이 도덕이게끔 해 주는 것이 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가 인식 작용에서 드러나듯이 선은 도덕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인간다운 행위 중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를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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