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영상이 알려준 해답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다를 때. 내가 앞서서 무언가 행동할 때. 그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결국 내 오지랖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나의 오지랖 범위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을 부단히 도 해 왔으나 그것이 잘 된다면 오지라퍼로 살아온 그간 내 삶이 한편 우습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주고도 속상하고 받지 못해 속상하고 그 모든 원인들이 나의 오지랖 때문이니 이래도 내 탓 저래도 내 탓이려니 하며 지냈는데 이번 모임에서 나는 뭐랄까 조금 다른 균열을 느꼈다.
같이 만나던 모임 멤버가 수술하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유하는데 모두가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평소 그만큼 친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한 이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반응에 더 이상 말하면 내가 속상하겠어서 그래 나는 그 분과 잘 지냈으니 나라도 가는 게 맞지 하고 홀로 요양원에 찾아뵙고 오는 길. 오지랖을 핑계 삼기에도 뭔가 씁쓸한 기분의 원인이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유레카!
내가 그간 그렇게 목말라했던 것은 오지랖이 때문이 아니라 나와 같은 "행동공감"이었던 것이다.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휴 같이 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던 것.
나는 행동 공감력이 조금 높은 편인 것이지. 오지랖이거나 불행컬렉터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균열의 답이 해결되니 마음의 짐이 좀 풀리는데 이것이 유튜브의 순기능이랄까?
암이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 누구도 별일 없어하진 않았다. 그들은 나름 감정적 공감은 표시했다.
아이고 어쩌나. 세상에 이런 등등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행동적 공감을 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이 찾아가자거나 돈이라도 좀 모으자거나 하는 어떤 행동들 말이다.
40년 넘게 내 탓이려니 하고 살아온 게 그저 취향의 차이거나 패턴의 차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민트초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탕수육을 부먹과 찍먹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그저 그 사람들이 행동적 공감이 발현되지 않은 것뿐. 물론 그들도 그들 마음의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행동으로 나타나겠지만 말이다. 어쩌다 발견한 유튜브 영상의 행동공감이라는 단어 하나가 내가 가졌던 많은 의문점들을 풀어주었다.
억울했던 내 마음도 다독여주었고 그들도 모르게 내가 마음으로 미워했던 사람들도 조금 이해로 내려놓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원인은 알았는데 앞으로 나의 행동공감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라는 문제가 아직 남았다. 보이니 안 보인다 할 수도 없고 들리는데 안 들린다 할 수 없듯이 해주고 싶은 것도 해줘야지 어쩌겠는가 다만 그들에게 실망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갈길을 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