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디렉터 부부가 계획한
부사장님과의 식사는
분위기가 좋았다는 후문이다.
전날
사모가 잠시 그 집을 들렀었는데
꽃이며 장식품이며
집안도 꽤나 꾸며 놨다더라.
뭐,
그쪽으로는
일가견이 있는 부부이니
어련히 잘했을까 싶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도 아니고
밥 먹자고 모인 테이블인데
분위기가 안 좋을 일이 뭐가 있겠나.
드디어 식사를 하기로 한
D day.
정해진 장소를
구글로 미리 둘러보며
메뉴와 분위기도 미리 확인했고
윗 분들이 많으니
가서 보여야 할 말과 행동에 대해
혼자 리마인드 하며
잔잔한 긴장을 탔더랬지.
단정한 꾸밈새를 하고
아이들에게도 어떤 자리인지
다시 한번 설명하며
행동을 주의시켰다.
10월이라 해가 일찍 저물어
오후 5시인데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졌고
9월 말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으로
길바닥은 빙판이었다.
우리 부부는
약속에 서두르는 편인지라
늦지 않게 식당에 도착했고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는데
아차차..
부사장님이 벌써 와 계셨네?!
상무와 사모가
부사장님을 응대하며 서 있었고
끝장나온 직원 세명과
이 식사를 총괄하여 준비한
인사과 박 디렉터(주재원 후 영주권자)
가족이 와 있었다.
남편을 필두로 부사장님께 다가가
어떤 일을 하는 누구인지
인사를 드렸고
아직 붐비기 전이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얼핏 본 사모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 원피스에
작은 큐빅들로 포인트 장식이 된
재킷을 걸치고
검은 스타킹에 검은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
멋있다고 엄지를 올려 보였지.
그러는 사이에
다른 가족들도 도착을 했고
안면이 있는 부인들과는
눈인사를 주고받던 중에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허허 거리며
웃는 상으로 등장하신 사장님 뒤엔
본사 전무님과 인사팀 상무님도 계셨으며
또 그 뒤로는
끝장나온 일반 직원 한 무리가 있었다.
마치,
조직의 보스가
등장하는 씬이었다고나 할까
그 순간
삼삼 오오 모여 재잘거리던 사람들은
조용해지더니
바다가 갈라지듯 길을 트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들 뭔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레
사장님 계신 곳으로 모여들어
원을 만들어 섰고
사장님은
그런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하나하나 악수를 하셨는데
남편 차례가 되자
사장님께서 남편을 알아보시고
말을 건네 신 거에
잠시 나 혼자
충격과 감동의 도가니였다.
아니,
일개 직원을 기억하시고
예전 에피소드들을 먼저 말씀해 주시다니!
(처음 주재원 하던 시절에도
가까이 뵌 적이 있다)
콩고물에 아우성인 여편네들 사이에서
순간,
어깨가 당당히 펼쳐지더라는.
동시에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부사장님.
사장님 일행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장님 쪽으로 발을 옮겼는데
부사장님 곁에서
말벗해 드리던 직원들도 빠져나가고
부 사장님은
잠시잠깐 혼자 서 계셨던 거다.
그걸 나만 본 건지
머뭇거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내가 남아서 응대하는 것도
웃긴 일 아닌가.
나야 비서였고 승무원이었기에
의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부사장님이 보기엔 직원도 아니고
안면 있는 임원 와이프도 아니고
누군지 모를
처음 보는 어느 집 여자이니 말이다.
괜히 혼자 눈치 보는 사이에
부사장님은
본인의 지정석으로 걸어가 앉으셨고
나도 남편곁으로 가 서 있었던 거다.
내가 그렇게 신경이 쓰였던 이유는
바로
사모의 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모가 말해주길
사장님과 부사장님은
사이가 그리 좋진 않으시다고.
해외파로
이 사업 영역을 처음부터 성장시킨
사장님.
국내파로
본사 재무 통이라 불리며
판이 커진 이 사업파트에
오너 패밀리의 입김으로 들어온
부사장님.
누가 봐도 섞일 수 없는 결이었고
업무 스타일도 정 반대이다 보니
부딪히기도 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역시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더라.
그렇게 악수 한 바퀴가 끝나고
다들 앉자는 사장님의 말씀에
자리를 보니
누가 정한 건지
지정석으로 세팅이 되어있었다.
큰 룸에
4인 용 테이블은
길게 두 줄로 줄 지어져 있었고
한쪽 줄의 중간은 사장님,
다른 줄의 중간엔 부사장님이
서로 마주 보게 되는 면으로
착석하셨다
그리고
우린 어딘가 하고 봤더니
내 남편이 사장님의 바로 옆자리네?!
'아깝다..'
나는 비서도 했었고
승무원도 했었던 지라
윗사람과의 자리에서
상석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정면자리.
아니면 대각선 정면자리다.
바로 옆 자리는
옆이니 좋지 않냐 하겠지만
오히려 등잔 밑이 될 수 있는 자리다.
무의식적으로
그럼 맞은편은 누군지 살폈더니
염 차장이네.
그렇게 염차장은
사장님 맞은편에 앉게 되고
그의 나머지 식구 4명(딸 셋과 부인)과
우리 가족 4명이 마주 앉게 된 거다.
참 생각 없다 여겨진 건
염차장의 바로 옆자리.
그러니까
사장님의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큰 딸을 앉혔다는 거였다.
아무리 가족 동반 자리라지만
사장님을 응대할 만한 어른인
부인이 앉아야지
그렇게 시선 노출되는 중요 자리에
아이를 앉히다니
나로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보통 아인가?
남의 집 마룻바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섹시댄스를 춘 아이잖아.
그 자리 그리 쓸 거면
내 남편을 줘라...
그럼
사장님의 또 다른 대각선 맞은편은
누구였냐.
바로 이 차장.
그리고 그 옆은
그의 부인 거짓말쟁이 J.
건너편은 어떤지 봤다.
한 중간에 부사장님이 앉으시고
그 맞은편에 상무와 사모.
부사장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재무 출신 이 디렉터 부부도
부사장님의 옆에 앉았더라.
그리고
상무네 예전 집사 유 과장도
부인 없이 혼자 와서
그 테이블 쪽에 와있었다.
말로는
부인이 아파서 혼자 왔다고 했다는데
사모 뒷말을 하고 다닌 여자였으니
올 수가 있겠나.
모두가 짐작하는 바였다.
그렇게
주재원 6집,
영주권으로 돌린 직원 3집,
10명이 넘는 출장자들이 모였다.
참석하기로 한 모든 인원들이
착석을 마쳤고
나는 드디어
염차장의 부인 S와 마주 할 수 있었다.
나를 피해
어덜트 스쿨의 오후반을 다닌 다는
미스터리한 그녀 S.
키와 체형은 나와 비슷했고
멋 하나 부리지 않은
수수한 차림이었으며
들어서 알고 있던 나이보다는
많아 보이는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처음 뵙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웃으며 인사는 했지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길게 떠들 생각은 없었지만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 사람 참 사회적이지 않구나 싶더라.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는데
살짝 실망이.
차라리
외모든 말투든 행동이든
싸가지 없는 구석이 있다면
그동안 벼르고 있던 내 마음이
정당화되겠는데
그렇지가 못한 첫인상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여자들 사이에서
이런 수수하다 못해
부족해 보이는 차림새와 행동이
사모눈에는 좋아 보였나?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에게 말했던 게 떠 올랐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를 하고 다니면서
나는 왜 피하는 건데?
누구한테 뭘 듣고 그러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