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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스미

우리가 새로 이주한 지역은

미국 남서부 지역으로

이전의 곳과는

정 반대되는 계절감과

기온을 보여줬다.




눈 폭풍을 피해 온 이곳은

전혀 딴 세상이더라.




한 겨울인데도 사람들은

얇은 경량패딩 하나 입은 게

전부였고

곧 꽃이 필 것 같은

몰랑몰랑한 봄 냄새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커먼 겨울 옷으로

꽁꽁 싸매고 등장한 우린

누가 봐도 이방인이었지만

햇빛정책의 실험 대상자들처럼

겉옷은 점점 가벼워졌고

별거 있겠냐는 나의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제일 좋았던 건

카페다운 카페가 있다는 거였다.




예전 살던 곳은

마치

한국의 70년대를 연상시키는

깡 시골이었던 지라

동네에

카페랍시고 갈 수 있는 곳은

딱 두 군데였는데

그 마저도

바이브를 즐긴다거나

감성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주말마다

남편과 새로운 카페를 탐방하고

즐기는 재미로 보냈더랬지.




그리고 1월이 되자마자

운동을 시작했다.




이 또한,

예전의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선택의 폭이 넓은 걸 보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모른다.




gym에 멤버십을 끊어

매일 다양한 프로그램을 들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구나

싶더라.




사모와의 연락도

계속 이어졌다.




사모는 통화할 때마다

그곳은 어떠하냐는 질문을

항상 했었고

새로 얻은 집이며

남편의 회사 분위기,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 모습도

궁금해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은 빼고

사실 위주의 이야기들만 하려고

애썼던 거 같다.




궁금해서 나에게 묻긴 했지만

보나 마나

더 좋고 나을게 뻔한데

그걸

직접 확인하는 심정이 어떨지

알 것 같기 때문이지.




그렇게 통화를 이어오는 동안

사모는

내가 묻는 경우가 아니면

나에게 따로

장과장과 최차장에 이야기

하지 않았었다.




별다른 큰일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땅에 있지 않는 나에게

굳이 얘기해서 뭐 하나

싶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지내는 동안

5월이 찾아왔고

우리보다 먼저 그 땅을 밟았던

도련님 고차장과 그의 부인 L이

이제 한국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그래도

그 땅에 L이 있다는 게

나에겐 안심이었고

사모에겐 위로였는데

이제 그마저도

기한이 다 되어 간다 생각하니

신경이 쓰이더라.




"고차장은

아주 운이 맞은 거지~

내 남편이 먼저 들어가

자릴 잡고 있으니까

그 밑으로

바로 들어가면 되잖아.

아니었음

굴러들어 온 돌 취급 당해서

어느 부서로 가나 했을 텐데"




주재원이 복귀를 할 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빈자리가 있는

다른 팀으로 들어가는 일이

허다하기에

그건 나도 좋겠다 싶더라.




심지어

쫙쫙 끌어주는,

지난날 진한 인연으로

함께 지냈던 사람 밑이니 말이다.




사모는

그 땅에서 지내야 하는

본인의 시간이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통화를 할 때마다

카운트다운을 했다.




당시 사모의 아들은

11학년이었으니

이제

1년 정도의 시간만을

남겨둔 상태였지.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사모의 목소리는 한 없이 밝았고

앞으로의 본인 청사진을 펼치며

기대에 차 있었는데

좋다 좋다 맞장구를 치면서도

그럴 때마다 안쓰럽기도 했다.




하나둘씩 떠나는 그 땅에

마지막까지 남아

손만 흔들어 주고 있는 그 심정이

말이 아니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겉으로는

너무도 당당하게 괜찮다 하고

이까짓게 뭐 별거냐 했지만

사실 그 속은

말이 아니었던 거고

본인의 시간을 세어

달력에

빨간 엑스를 하나하나

쳐 나가면서

탈출의 그날만

꿈꾸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고차장과 L이 떠난 후

그 해 7월에는

이 차장과 부인 J가

한국으로 복귀를 했다.




나와 사모를

맥도날드 대첩으로 초대했던

그 거짓말쟁이 J 말이다.




그 난리를 벌여 놓고

기도 모임 한답시고

내 이웃집에 드나들면서

나를 또 긁어 댔던 그 J.




세 부부가

회사에서 삼자대면을 했을 때

무릎을 꿇고 소리 지르며

난리를 치던 그 J.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버텨

영주권을 따겠다는 포부로

나왔는데

연장도 없이

3년 만에 들어가게 됐으니

그 발걸음은

터덜터덜이었을 거다.




그렇게 이제는 정말

사모만 남은 상태가 되었네.

또 다른 빌런들과 말이다.




사모는 마치,

장기수가

얼마 남지 않은 출소를 기다리며

더 애를 태우듯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갔고

그 땅엔

뜨거운 여름이 지나

찬바람 부는 가을이 도착했다.




그리고 나에겐

다른 소식이 도착했지.




"블래스미!

이 차장 그만뒀대!"




"네???

정말요???

왜요????"




여름에 한국으로 복귀했던

이 차장은

그전에 일했던 팀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워낙

개인주의였던 사람인 데다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 팀원들이 죄다 바뀌어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으로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물론

업무 능력도 존재감은 없었고.




그런데

어느 날 사표를 냈다 하네?




들리는 얘기로는

강릉 쪽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식당을 열었다고 하더라.




사실 원래

이 차장은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남자였기에

집에서도

밥 하기 담당이라고 들었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식당을?

집 밥만 하던 사람이

경험도 없이 식당을??




그 부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실행한 거겠지만

그 둘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나로서는

글쎄 올시다였고

뻔할 뻔이었네.




어쨌든

젖은 낙엽처럼 착 달라붙어

어떻게든 존버할 듯 보였던

이 차장이

지 발로 나갔다 하니까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나

싶으면서도

나중에 내 남편이 복귀를 할 때

그 면상 보지 않아도 되니

후련하다 했더랬다.







그러다 얼마 후

또 다른 사람의 이동 소식을

듣게 되었지.




그때도 마찬가지로

차라리 잘됐다 싶었는데

뒤통수 한 방을

준비한 후였을 줄이야...




지금 생각해도

눈이 질끈 감긴다.




"블래스미!

소식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