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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곳간 채우기
by
블레스미
Dec 3. 2024
하... 김치...
김치통이 바닥을 보인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현실도피를 한 달쯤 했단 뜻이다.
미국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를 쫄리게 만드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김치다.
타국에 살면서
뭐든 아끼게 되고
쟁여놓게 되는 버릇이 생겼는데
김치를 꺼낼 때마다
뚜껑을 닫기 전
인벤토리를 실시한다.
'아직 괜찮아'
'절반이네'
'일곱 쪽?!'
'세 쪽...'
점점
나를 쫄리게 만드는 상황으로 흐른다.
한국에서
김치를 이리 열심히 먹었던가??
김치냉장고가 있었지만
야채랑 다른 저장식품이
더 빼곡했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라
김치를 넣은 메인
요리보다는
라면의 단짝 자격이나
구색 맞추기 용으로
식탁에 오르던 아이였다.
심지어
신혼 맞벌이 땐
집에서 밥 먹는 사람이 없으니
허옇게 변해버린 김치를
갖다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은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거니와
김치의 신이 있다면
무릎 꿇고 잘못했다 빌어도
모자를 행동이었다는 거
백 번 천 번 인정한다.
그때
내가 하늘로 보내줬던 김치들이
지금 내게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
미국 와서 돌밥 하는 나에게
김치는 '찬스' 같은 거다.
밥 하는 데에
시간 뺏기고 싶지 않을 때.
뭐 해 먹을까
답 없이
메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장을 봐와야 하는데
정말 정말
꼼짝하고 싶지 않을 때.
이리저리 지출이 과했다 싶어
집에 있는 걸로
한 끼 해결하자 싶을 때
.
김치냉장고 속에서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김치를
필요한 만큼
잡아
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능의 식재료로 쓰기 위해
우리 집은
매번 작은 김장을 하듯이
김치를 담근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땐
사다 먹던 적도 있었는데
도저히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
김치를 메인으로 요리를 하는 건
사치였고 플랙스였다.
그래!
그럼 담그면 되잖아!!
문제는 나의 게으름,,?
귀차니즘,,??
필요한 재료 사러
아시안 마트에 가면 편도 40분.
왕복 한 시간이 넘는다.
사가지고 오면 누가 해 준대니?!
배추를 절이고
물을 빼는 시간 때문에
완성까지 이틀이 걸린다.
이틀 동안
집에서 파 마늘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재료들을
씻고 다듬고 썰고 갈고 하느라
내 손은 할머니 손.
허리는
집을 나가 저 멀리 먼 곳에.
총 출동한
주방기기, 물품들 때문에
누가 봐도
도둑 든 집의 꼬라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실도피한 이유.
두 눈 질끈 감고
정신승리로 버틴 이유.
내가 한국 살았음
종류별로 사다 먹었을 텐데
내 나이에
김치 담가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 담가먹던 때가
32살이었는데
그 나이에 누가, 어떤 여자가
김치 담가 먹고살겠냐고...!!
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듯했다.
냉장고와 팬트리를 뒤적여서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아침 일찍 마트로 달렸다.
이번엔 배추가 좋아 보여서
잘 왔구나 싶었다.
필요한 것들을 담고
계산대에 쌓아 올렸더니
캐셔가 김치를 하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배추랑 오이김치를 좋아한다길래
농담으로 "you can join us!"
과정이 많아서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들었다며
웃으며 손을 내 젓던 그녀.
응, 나 지금 그거 해야 해.
하룻밤을
배추 절이는 일에 바쳤다.
미국 배추는
왜 이렇게 두껍고 빳빳한지
희한하다.
그래서
나는 잘 절이기 위해
두 단계를
거치는데
우선
깊이가 있는 곰국 냄비에 물을 받고
소금을 한주먹 넣어 녹인 후
쪼개놓은 배추를 담갔다가 빼 준다.
그러고 나서
한 장 한 장 들어 올려
소금을 뿌려주는 방식이다.
절일 때 쓰는 소금의 양은
전체 배추 무게의
1%가 적당하다고 한다.
소금 팍팍 뿌려
젤 큰 스탠볼 3개에 나눠 담았다.
이제 굿나잇.
10시간 정도는 절여야
김치로 승격될 식감을
얻더라.
내일 말랑말랑하게 만나자고~~
늦잠을 잤기에
눈 뜨자마자 배추부터 만져봤다.
죽이 됐을까 봐....
옥케이!
수도를 틀어
흐르는 물에 배추를 샅샅이 씻고
받아 놓은 물에 담가 흔들어
남은 소금기를 빼줬다.
그리고는 다시,
시간이 해결해 주는 과정.
스탠볼에 채반을 엎어 넣고
배추들을 쌓아 올려
물을 빼는 것이다.
절여놓으니 얼마 없어 뵈네
자, 이제
본격적인 작업 시작이다.
풀을 쑤고,
쪽파를 다듬고, 무를 채 썰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양파, 마늘을 준비해서
배와 함께 갈아 놓았다.
대충 준비가 끝나면
젤젤젤 큰 스탠볼에
양념을 모두 부어 간을 맞추고
준비해 놨던
무와 쪽파를 넣고 버무렸다.
쪽파 뿌리는 모아놨다가
수육 삶을 때 퐁당.
준비한 양념을 모두 붓고
새우젓과 멸치 액젓으로 간을 맞췄다.
이제
요것을 배추 속에 채우기만 하면 끝!
배추랑 준비한 배춧속의 양이
아주 딱 맞아 보였다.
역시 경력은 무시 못 하지!
씻어 놓은 김치통에
차곡차곡 눕혀 놓았다.
워낙 큰 통이라
자리가 남을까 어쩔까 싶더니만
아주 딱 맞게 들어가고 끝났네.
매혹적인 빛깔에 고은 자태.
포동포동
아기 엉덩이 같기도 하고
영계백숙을
겹쳐 놓은 거 같기도 하고
가득 찬 모습을 보니
맘이 얼마나
뿌듯하고 든든하고 후련한지
오늘부터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ㅎ
그동안 못 해 먹던
김치요리 모두 부르시오!!!!
내 당당하게 맞서겠소!!!!
우선 오늘 밤,
손등에 크림 좀 덕지덕지 바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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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승무원, 강사, 교수의 타이틀이 있던 삶이었습니다. 미국 이주 후, 한국어를 가르치며 초기화 된 제 인생을 스스로 구하는 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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