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말 사야 돼!
유모차가 해결되지 않았다.
종이에 적혀진 출산 준비물들 중
거의 많은 것들이
이미 빨간 줄을 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들이라 해 봐야
언제든 구할 수 있는
자잘 구리들뿐.
그 종이 한 중간에
유모차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고
남들 빨간 줄 먹고 물러날 때
혼자서만
수십 개의 동글뱅이와 밑줄을 먹고 있어서
종이가 뚫릴 판이었다.
머리에는 별 왕관까지 쓰고 있었으니
나는 그 앞에서 '을'이 되어
초조하게 손을 비벼댔다.
그 주변 여기저기에 적혀진
많은 문제점들로
철벽을 치고 있어서
유모차를 빨간색 오랏줄로 묶는 건
매일매일 실패였다.
그때만 해도
쌍둥이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 판매되는 유모차들은
죄다 1인용이었다.
당연한 거지.
보통 임신과 출산을 거치고 나면
한 명의 아이를 품에 안는 게
일반적인 거니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할인매장이든 백화점이든
국내 브랜드이든 국제 브랜드이든
문의하는 족 족
없어요 또는 들어오지 않았어요.
찾은 적도 몇 번 있긴 하다.
검색의 파도를 몇십 번 넘고 넘어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너무 조잡한
너무 우스꽝스러운
너무 어이없는...
단박에 엑스를 누르고
파도타기를 끝냈었지.
공대 출신인 남편은
정 안되면
1인용 두 개를 사서
2인용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플랜 B를 발표했다.
다 싫었다.
조잡한 유모차에 앉히고 싶지 않았고
모두가 쉽게 사는 물건조차
손에 넣기 힘든 이 상황이
모두 싫었다.
최후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해외 직구.
지금은
이게 무슨 최후의 수단인가 하는
그런 시대가 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직구라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돈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고
관세와 택스가 엄청났었으며
주문한 사실을 잊을만하면
그 때서야 도착하는.
그마저도
배송 메일을 받기 전까진
진행 상황을 알 수도 없는.
'해외 직구 = 사기' 가
충분히 성립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코너에 몰린 남편과 나는
결제 버튼을 눌렀고
마음 졸이던 초조함이
점점
에라 모르겠다로 바뀌던
어느 날
유모차가 무사히
우리 집에 도착했다.
바다 건너온 그것을
난 외제차라 불렀고
11월 생인 아이들은
봄이 돼서야 첫 시승식을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태우고 나가기가 참...
나가기만 하면 삼보일배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그냥 지나치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쌍둥이예요?
아유~~이뻐라~~
어머나~ 세상에~~~
아니 어떻게 쌍둥이를 낳았어~~
애기 엄마~~
별의별
감탄사에 인사와 질문들....
심지어
저 멀리서 경보로 다가오는 사람,
왕복 4차선을 사이에 두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
지나가는 우리의 뒷모습을
한없이 지켜보고 선 사람,
손으로 내 어깨나 팔을 붙잡고
흔들어 대며
나를 앞뒤로 위아래로 훑는 사람.
다 만나 봤다.
다 겪어 봤다.
공통점은
아이들을 쳐다보는 건 잠시였고
항상 마무리 눈빛은
나에게 꽂혔다는 거다
있잖아
나 애들이랑 나갈 때
미용실을 다녀와야 하나 봐.
옷도 드레스를 입고 나가야겠다고.
아니 왜 이렇게들 나를 봐???
어??
왜???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쌍둥이를 낳았나~ 하나 보다.
어떻게 이 몸에서
쌍둥이가 나왔나~ 싶나 보다.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아유~~~엄마가 힘들겠다~~
얼마나 힘들면 엄마가 삐쩍 말랐네~
이 말이었다.
쌍둥이였지만
만삭까지 13kg 찐 게 전부였긴 했다.
낳고 나서 한 달도 되지 않아
내 몸으로 돌아오긴 했다.
그게 뭐??
나 원래 이 몸이야!!
애쓴다고
위로하고 싶은 말이었겠지만
위로로 들리지 않았고
내 착한 아이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드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소리로 들렸던 거다.
뭔데 날 불쌍히 여겨?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말했다.
동네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트럭 있잖아!
계란이~ 왔어요~~ 하면서.
나도 녹음을 틀고 다녀야 하나 봐
애들이 순해서
안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나 원래 이래요~ 원래 이래요~~
어때???
그보다도 더 더 싫은 상황은
나처럼 유모차 끌고 가는
애기 엄마와 마주치는 거.
육아에 지치고 힘든 그들에게
내가 위로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 여자보다는 낫구나
생각하는 거 같아서
쳐다보는 그 눈빛이
싫다 못해 혼자 화가 날 지경.
그래서
일부러 한 손으로 밀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살짝 오르막길이더라도
미소를 띠며
한 번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이는 악물었고
손목은 90도로 꺾였으며
배에는 힘을 주고
속으로 읏차를 외쳤지만 말이다.
요즘 들어
그때의 그 마음이 자꾸 생각난다.
내 상황이
남에게 위로가 된다는 게 싫었던
그 마음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떤 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를.
얼마전에
우연히 아주 우연히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공통된 아픔을 품은 그녀더라.
내 마음은
순식간에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서게 되었고
뭔가
우리끼리만의 비밀이 있는
단짝 친구,
그 비밀에 대해
긴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동지가 생긴 것 같아
든든했다.
소화되지 않던 아픔이
드디어 목구멍으로 넘겨지고
위를 통해 장을 통해
조금씩 흡수되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발산하고 싶다는 기분까지 들게 한
그녀였다.
하지만
최근에 알아버리고 말았다.
같은 양과
같은 질량과
같은 밀도가
아니었음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의 마음은
그럼 그렇지 나만 이었네로
한순간에 돌아서버렸다.
그녀의 아픔은 그냥
엄살과 투정으로 격하되었고
심한 배신감을 느껴 화도 났다.
그런 거였어?
그걸로 나에게 견줬던 거야?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좋은, 희망적인 말들을
해 줄 수도 있고
내가 겪은 비슷한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고
같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도와준다거나
이야기만 들어주어도
또는 같이 있어주기만 해도
위로가 될 수 있다.
그중에
나에게 해당되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남의 고통이
내 것보다 크고 깊고 세야
위로가 되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래, 못돼 처먹었다 하자
고약하고 악독하다 하자.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다면
그 맞음을 인정한다.
아이들에게는
그럼 못 쓴다고 가르치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아직은 면전에 대 놓고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가면 쓰고 싶지 않고
부정하고 싶지 않다.
어쩌라고 이게 난데.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하던데
이것 또한
그중에 하나일 뿐이다.
알게 돼서 개운한 기분도 들고
그러면서
왠지 당당해지는 느낌도 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모두가 착하면 재미없잖아.
어쩌면
더 더 더 늙으면
나도 꺾여서 착해질 수 도 있잖아.
미움받을 용기의
실천 편이라고 해 두자.
니가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어 보였던 거
오르막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밀어 올렸던 거
내가 너 그때 왜 그랬는지
이제야 정확히 알겠어!
니가 남의 고통에
위로 받는 사람이니까
남도 그럴까봐
너의 고통을
안 보여주고 싶었던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