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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나에게 보내는 지독한 사랑

by 블레스미

주재원 와이프 팔자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저 하늘,


날 무지하게 사랑하시네.


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정확히 2년 하고 6개월 만에


다시 재 발령을 받았다.


남들은 한 번도 가기 힘들다는 주재원을 두 번씩이나 간다는 이유로


주변의 부러움을 잔뜩 샀지만,


글쎄?


4년 정도 후 돌아올 때쯤이면 아이들은 그 무섭다는 중2가 된다.


학업적으로 빈 구멍을 메꾸느라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겠지.


나 또한,


인생 제2막을 시작하겠다며


돌아와서 부지런히 일궈놓은 내 필드를 다시 갈아엎게 생겼으니


이게 맞냐 싶었던 거다.


그럼에도 남편은 가길 원했고


이 결정이 또 다른 기회의 시작이겠거니 생각하며


우리는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처음 발령 때 살았던 곳 근처로 가는 거라


두려움과 막연함은 없었다.


한국에서 어떤 생활 용품을 사 가야 하는지 훤히 알고 있었기에


단지 필요한 건 돈이었을 뿐,


고민하고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짐은 컨테이너에 싣어서 배로 먼저 보내는 거라


그전에 필요 없는 것들을 최대한 속아 냈고


전압이 맞지 않는 가전들은 팔거나 가족과 지인들에게 입양을 보냈다.


다시 돌아올 아이들을 위해 문제집을 과목별로 사들였고


국어, 사회, 역사 과목과 관련 전집도 중고로 장만을 하고 났더니


이건 영어를 배우러 가는 거야?


한국말을 배우러 가는 거야?


현타가 잠시 오셨더랬다.


서류들을 착착 준비해 여권과 미국비자를 갱신했고


예전에 한참 도움을 많이 받았던 미국 내 커뮤니티 사이트를 다시 들락거리며


현실 정보들을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착착 진행됨에 이것이 경력직의 힘인가 싶었던 시간들.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난장판이 되어갔고


메모로 가득했던 내 다이어리 속 달력 숫자들은


빨간 엑스를 먹으며 차례로 물러나고 있었다.


양가 가족들과 친구, 지인들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가겠다며


부지런히 나돌아 다니다 보니


어느덧 늦가을이 되었고


우리는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잠시 미국을 다녀와야 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던 그곳을


다시 가네, 다시 가.


공항에 도착하니


그곳의 공기가 순식간에 나를 그때의 나로 돌려놓는 기분이더라.


약속을 잡아 뒀던 리얼터와 만나서 집을 돌아보고


다행히 딱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뒷마당도 얼마나 예뻤는지 바로 이거야를 외치며 한 번에 끝냈지


집이 결정되면서 배정될 학교도 방문했다.


우리 부부가 교장선생님과 면담하는 동안 아이들은 영어테스트를 받았는데


다행히 아이들 머릿속엔 영어가 남아 있었기에


큰 스트레스 없이 마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운전면허.


차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라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운전이다.


집 주소가 정해졌으니 관할 DMV로 이동.


가서 예전에 땄던 면허를 내밀며 사정을 설명했더니


갱신할 시기를 놓쳐서 다시 따야 하지만


조건부로 다시 발급해 주겠다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아니었으면 저걸 다시 딴다고 다시 시험 치고 고생할 뻔했으니


그야말로 할렐루야였다.


방방 뛰며 시뻘게진 얼굴로 기쁨을 분출해 내 보였더니만


본인이 베푼 선처의 반응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더라.


이렇게 미국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굵직한 것들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와서는


우리가 살던 집도 세입자를 찾아 계약서를 작성하고 났더니


이제 정말 가는 일만 남았구나 하며 날짜를 세고 있던 어느 날


서재에서 남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쯤이면 항상 미국 현지와 회의를 하던 사람이라


오늘도 그런가 싶었는데


목소리가 여느때와는 좀 다르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됐는데 듣자 하니 여자 목소리??


뭐에 이끌리듯 그 방으로 점점 다가가 봤다.


남편은 존댓말을 써가며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데 어색한 웃음까지.


내가 빤히 쳐다보자 입모양으로 뭐라 뭐라 말하는데


내가 알아듣질 못하니 종이에 적어 보여줬다.


'사모'


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을 했더니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고 통화를 마무리하더라.


"누구? 사모가 뭐야??"


"상무님 와이프"


"어?? 왜?????"


상무와 통화는 말이 되지만 와이프랑??


우리가 파견되듯이 미국에는 이미 몇 집이 살고 있는 중인데


그중에 한 집이 상무님이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회사의 핵심 오브 핵심이랄까


대단한 인사이트와 업무 능력으로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엄청나


위에서 사랑받는 분이고


일 잘하는 아랫사람은 학연 지연 없이 쭉 쭉 키워주시니


아래에서도 사랑받는 유명한 분.


그 분과 업무로 통화를 하다가 집을 구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옆에 있던 사모가 호들갑을 떨며 바꿔달라 했댄다.


반갑다 하시며


언제 오는 거냐, 식구가 몇이고 애들은 몇 살이냐, 집은 어디에 구했냐 묻더니만


주소를 말하니


본인들의 집 근처라며 너무 잘 됐다고 호들갑을 떨더라는...


에...???


말을 전하는 남편도 그 말을 듣는 나도 이건 뭐지 하는 표정.


원래 이런 건가?


이렇게 아랫직원과 사모가 통화를 하는 게 일반적인 건가?


보통은 궁금한 게 있으면


남편 옆구리 찔러 물어보게 하는 걸로 해결하지 않나?


예전에 처음으로 주재원 생활을 할 적엔


파견된 집이 우리 포함 딱 두 집이었고


같은 직급, 비슷한 나이대라 격 없이 지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뭔가 좀 당연스럽지 않은데??


주재원은 경력직이라 자신만만했던 내가


이건 뭐지 했던 당황스러운 상황.


그녀의 까랑까랑하고 톤 높은 목소리가 잔상이 되어


메아리처럼 울리더라.


이거 뭔가 좀 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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