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폭설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겨울은 끝이 났다.
5월이 되자
갇혀있던 봄은 쏟아져 내렸고
순식간에 여름까지 끌어들였다.
주재원 부족의 여자들은
아이들 방학에 맞춰
(미국은 아이들 방학이
보통 5월 말부터 시작한다.)
한국으로
잠시 홈트립을 갈 생각에
들떠 있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
이곳에서
내 성질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 보며 네네 거렸더니
지인들과 만나
내 언어, 내 방식으로
폭풍수다를 떨 생각만 하면
도무지 낼 수 없었던
호랑이 기운이 솟구쳤다.
가서
다 잘근잘근 씹어주리라
다짐했더랬지.
한국에 방문할 준비를
야금야금 하고 있을 때
빽으로 들어온 그 도련님,
고 과장의 둘째 아들이
곧
돌이라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아무리 아랫사람이어도
도련님이시니
잘 지내 놓으면 나쁠 거 없잖아?
그냥 생일이면
챙기는 게 오버일 수도 있는데
돌이라면 좀 다른 거니까!
애기엄마들이 선호하는
애들 옷 가게에 가서
기프트 카드를 사고
예쁜 종이백에 넣어
선물로 준비해 놓은 후
고 과장 부인 L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냈어요?
딴 게 아니라 줄 게 있는데
혹시 괜찮으면
잠시 내가 들러도 될까 해서요"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답을 듣고
이번엔
사모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에 가기 전에
'소녀, 다녀오겠사옵니다~'하고
큰 절 한 번 해야 할거 아닌가.
전화로 또는 카톡으로
인사 휙 날렸다간
한 달 동안
내 귀가 간지러울 거 같으니 말이다.
"사모님,
혹시
오늘 오후에 댁에 계시나요?
괜찮으시면
저 잠깐 들러도 될까요? "
"응,
상관없어~ 아무 때나 와"
먼저
고 과장 집으로 가
그 부인 L을 만났다.
L은
장난감으로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고 있었고
이제 돌이 되는 둘째는
L에게 매달려 징징거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내가 빨리 치고 빠져줘야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라는 판단에
기프트카드가 든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그냥 생일도 아니고
돌이라고 하는데
그냥 넘어가기 그래서요"
얼마나 좋아하던지
안 줬으면 어쩔 뻔.
고 과장이 등에 업은 빽을 생각하면
아랫사람인 듯,
아랫사람 아닌,
아랫사람 같지 않은 그들.
오늘 그들에게
마일리지 좀 쌓았네 하며
인사하고 나와
바로 사모네로 직행했다.
"어서 와~~"
들어서자마자
강아지 2마리가 달려들어
점프를 하고 다리를 짚어 대고
난리다 난리.
내가
강아지는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하는 걸
사모가 이제 알기에
그녀의 애견까지
이뻐해 줘야 하는 스트레스는
덜은 상태였다.
그동안
안부로 전화도 자주 하고
오가다가 잠깐씩 집에 들러
커피도 했으니
웬일로 왔냐고 묻는 사이는
이제 지났기에
사모는 자연스레
커피를 준비했고
나는 자연스레 소파로 가 앉았다.
" 저 고 과장 네 들러서
L 만나고 오는 거예요"
"어~그래?
왜??"
"그 집 둘째가 이제 돌이래요.
그냥 생일이면 넘어가겠는데
돌이라고 하니까
그냥 넘어가기 그래서
저 한국 가기 전에
기프트카드 하나 주고 오는 거예요."
"잘했다~잘했다~~"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말하더니
내 옆에서
자기를 쓰다듬으라고
난리를 치던 강아지를 데려가
끌어안더라.
"주니까 좋아하지?"
"좋아하더라고요.
주고 오길 잘한 거 같아요"
"자기네~
한국에 다음 주에 가는 거였나?
우리도
애아빠가 한국 가는 거 티켓 끊었어.
자기네 먼저 가고
우리가 가겠다"
우리보다 늦게 출발이지만
우리보다 일찍 돌아오는
여정이더라.
"근데,
자기네 공항 갈 때 뭐 타고 가?"
"공항에 주차비 많이 나올 거라서
우버 타고 가려고요"
"그래, 그게 나아~~
나도 그렇게 가자고 했는데 참.."
뭔 말인가 했더니만
알고 보니
상무님 한국 가시는 길
서로 다들
공항까지 바래다 드리겠다고
줄을 섰더구먼.
뒤통수 쳐서 관계가 쫑났던
예전 집사 유 과장은
여전히 용서를 구걸 중이었고
새로운 집사,
도련님 고 과장은
당연히 상무님 가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냐며
구애 중이었으며
우리보다 먼저 파견되어 나온,
일머리 없기로 소문난,
MZ와이프를 둔,
실세 앞에서는
애완견이 되어 버리는 김 차장도
합세하여
서로 하겠다 난리였던 거다.
"저러면
나 괜히 신경 쓰이고 별론데
하지 말래도 저 난리야~"
와... 징 하다 정말.
어떻게든
남들보다 한 번이라도 더,
아니면
반의 반만이라도 더
눈에 들고 싶어
뭐 할꺼없나
안간힘을 쓰고 찾는구나.
그러면서도
내가 먼저 가는 거 아니었음
어쩔 뻔했나 싶다.
남편 성격상
저런 거
때려죽여도 못 하는 사람인데
저들 사이에서
우리만 입 딱 닫고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냔 말이지.
말로는
신경 쓰인다, 귀찮다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돌아오는 편도 눈에 훤하네.
시간 맞는 누군가가
뽑혀 달려와
대기 타고 있다가
짐 싣는 거, 내리는 거 다 하고
(한국 다녀오면
다들 바리바리 싸 오는 짐들이
장난이 아님)
하나도 힘들지 않다는
말과 함께
미소를 날리겠지.
오랜만에 봬서 너무 좋다는 말은
1+1 일 테고.
처음엔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어서
'아.. 씨... 저기 껴들었어야 했는데'
하다가
시킨다고 할 남편이 아니기에
차라리 해당이 안 됨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그렇구나~~ 아깝다!
날짜 맞았음
저희가 모셨을 텐데요~~
저희 집이
댁에서 제일 가까우니 좋잖아요~"
맘에 없는 말 한마디로
인심 거 하게 쓰고
하고 싶어도 못하니
안타깝다는 표정 지어주면서
상황 마무리.
이 정도면 잘 막았다며
셀프만족으로
그 집을 나섰지.
다들 저 집 머슴이 되고 싶어
안달이구만.
하기야,
나도
순간
눈빛이 타올랐던 걸 생각하면
할 말 없는 입장이긴 하다.
그냥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일들만 하면 안 될까?
어후..
날짜야 빨리 가라!
어여 한국에 가서
내 편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