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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r 20. 2023

<14> 동방의 우울한 낙타를
동경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이집트 여행

“나는 머나먼 남쪽 땅들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동양을 보았다. 광대한 사막과 놋쇠 종을 단 낙타들이 우글거리는 왕궁을 보았다…. 나는 파란 바다, 순수한 하늘, 은빛 모래,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타는듯한 눈에 후리(이슬람교에서 천국에 있다는 아름다운 여인)의 언어로 나에게 소곤거리는 여자들을 보았다.”



소설 ‘보바리 부인’ 저술가로 유명한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교 생활을 꺼리고 평생 책상에 붙어 지냈다. 스스로를 ‘토굴 속의 곰’이라 칭했을 정도로 수도승처럼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동방은 어릴 적부터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고대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발흥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이스라엘은 당장이라도 달려가보고 싶었다. 나일강이 흐르는 이집트가 특히 그랬다. 


그는 이집트에서 낙타 모는 사람이 되어, 그곳 올리브 빛 피부를 가진 여성에게 동정(童貞)을 빼앗기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플로베르가 18세 때 쓴 ‘미치광이의 기억’이란 글에 나오는 표현이다. 하지만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동방여행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인 루앙을 떠나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학은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했고, 설상가상으로 23세가 시작되던 해 간질로 추정되는 신경성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의 법학 공부를 중단시키고 센강이 흐르는 고향 근처 크루아세에 아름다운 집을 구입해 그곳에 살도록 했다.


플로베르는 여러 차례 동방여행을 꾀했으나 부모가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많은 유산을 받게 되면서 친구 막심 뒤 캉과 함께 여행계획을 세운다. 


마침내 28세 때인 1849년 10월 29일 동방여행을 위해 파리를 떠난다. 그의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 ‘성 앙투안의 유혹’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지만 반응이 냉담했다. 루이즈 콜레란 여성을 사귀었지만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우편물 증기선은 지중해의 명소 몰타 섬을 거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으며, 카이로에 들어간 것은 11월 26일. 플로베르는 1850년 2월부터 5개월 동안 돛단배를 타고 기나긴 나일강을 오르내리며 이집트 곳곳의 유적지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틈틈이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감상 편지를 썼다.


5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열대의 더운 공기를 호흡하며 푸른 하늘과 야자수와 낙타를 바라보고, 물소 젖을 마시며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별을 보며 잠드는 위대한 이기주의자처럼 살고 있다네.” 


고대 도시 테베를 둘러보고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모든 건물이 부서지고 4분의 3이 모래에 파묻혀 있지만 아직도 폐허가 남아있어 쉬지 않고 돌아다녀도 구경하는 데에만 사흘은 걸려요. 두 산맥 사이에 있는 큰 벌판인데 나일강이 가로지르고 오벨리스크와 기둥들과 건물의 전면, 거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답니다. 카르나크 궁전에서 받았던 첫인상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인간을 참새처럼 통째로 꼬치에 꿰어 금 쟁반에 올려 대접해야 할 거인들의 거처처럼 보였어요.”


노예 상선을 만난 사연도 어머니에게 전했다. 


“그저께 흑인 여자를 가득 실은 노예 상선 두 척을 방문했지요. 여자 노예들은 대개 다르푸르, 칼라스 제국, 아프리카 내륙에서 납치당해 온 사람들이더군요. 그들은 우리네가 수레에 차곡차곡 싣는 짚단처럼 배 안에 서로 뒤엉켜 있었어요. 걸친 것이라곤 부적과 작은 가죽 팬티뿐이었죠.”


이집트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순수함의 발견이었다. 프랑스 상류 사회에 만연한 내숭과 오만, 독선에 염증을 느끼던 그가 이곳 카페에서 당나귀가 똥을 누고, 그 옆에 있던 신사가 거리낌 없이 오줌 누는 모습을 본다. 최고 수준으로 교육받은 남자, 가장 고상하다는 여자들조차 천하고 외설적인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그가 더 관심 있게 본 것은 낙타 행렬. 지치고 힘든 병사들처럼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낙타에게서 자연스러움과 겸손을 배운다. 카이로에서 플로베르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이슬람교도, 콥트교 신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살핀다.


홍해 부근에서 사흘 동안 사막 체험을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시리아로 가서 베이루트를 거쳤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란까지 여행할 계획이었으나 여비가 부족해 지중해 로도스 섬으로 방향을 틀어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가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이후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동방여행은 1851년 5월까지 1년 7개월 간의 긴 여정이었다. 여행 전 기간을 합쳐 가장 중요한 성과는 누가 뭐래도 자기 내면의 발견이다. 여행 중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 데서 알 수 있다.


“나는 평온한 삶을 위해 내 문제에 대한 나만의 견해를 갖고자 해. 내 힘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나를 통제하게 될 확고한 견해 말이야. 경작을 하기 전에 내 땅의 질과 그 한계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 난 내 내면의 문학적 상태와 관련하여 우리 나이의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적 삶과 연관해 어느 정도 느끼게 되는 것을 느끼고 있어.”


플로베르는 여행에서 다녀오자마자 그의 대표작이라 할 ‘보바리 부인’을 집필하게 된다. 꽤 오랜 기간 구상했지만 선뜻 펜을 잡지 못하다가 동방여행에서 결정적인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영감의 핵심은 ‘권태’였다. 작가 자신이 이집트 여행 중 이유 없는 권태를 느끼다 ‘유부녀의 권태와 그에 따른 탈선과 불륜’을 주제로 삼게 된 것. 주인공의 이름 ‘보바리’도 이집트의 어느 폭포를 관광할 때 떠올린 것이다.


‘보바리 부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작품 속 ‘관능적 색채’가 문제 되어 기소된다. 그러나 법원으로부터 ‘문학은 풍속을 순화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지만 무죄가 선고됐다. 이런 논란 덕에 책은 불티나게 팔렸고, 30대 중반 젊은 작가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플로베르는 이후에도 크루아세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살람보’ ‘감정교육’ ‘부바르와 페퀴셰’ 등 펴내는 작품마다 각광받았다. 그의 작품 곳곳에는 20대에 다녀온 동방여행의 흔적이 묻어난다. 그는 평생 동방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죽기 직전 조카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난 2주 동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야자나무를 보고 싶은 욕망, 황새가 첨탑 꼭대기를 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단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플로베르의 나일강> 귀스타브 플로베르, 이재룡 옮김, 그린비, 2010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베르 티보데, 박명숙 옮김, 플로베르, 2018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청미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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