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Mar 21. 2023

<15> 이웃 나라에서 자유와 사랑을 찾다

-스탕달의 이탈리아 여행

“이탈리아야말로 내가 묘사하는 나무가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멋진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감동이 몰려오는 수준을 넘어 심장이 마구 뛰고, 어지럼증을 느끼다 심하면 의식이 혼미해지는 증상을 가리킨다. ‘적과 흑’을 쓴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1783~1842, 본명 앙리 벨)의 실제 경험에서 유래한 말이다.


스탕달은 34세 때인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던 중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심한 현기증을 경험했다.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상황을 그는 ‘나폴리와 피린체’란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을 보고 성당 계단을 내려오는데 무릎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지면서 마치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조국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밀라노에 건너와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폴레옹 신봉자인 그는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7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그는 이탈리아를 마음껏 즐겼다. 반도 각지를 구석구석 여행하며 자유와 사랑을 만끽했다.


스탕달의 일생은 반항, 정열, 사랑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평생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작가로서의 출세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엄격하게 가정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생긴 독특한 성정이라 여겨진다.


그는 프랑스 동남부 그르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과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는 바람에 어린 시절 사랑에 굶주려야 했다.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강압적인 교육에 반발하며 반항심이 커졌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노예 상태였다고 말할 정도다. 16세 때 파리로 나온 것을 ‘탈출’과 ‘해방’이라 여겼다. 그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그르노블을 상기시키는 것은 모두 내게 혐오감을 일으킨다. 아니 혐오감이란 말은 너무 고상하다. 구역질이 난다. 그르노블은 내게 지긋지긋한 소화불량의 추억 같은 곳으로, 위험은 없지만 끔찍한 혐오감이 있다."


스탕달은 고향 그르노블뿐만 아니라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전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부르주아가 판치는 세상, 위선과 편견이 만연한 사회라고 여겼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는 자유와 사랑이 넘쳐나는 정열적인 나라라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 통일되지 않은 도시국가 형태의 나라여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특별히 관광객이 많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겠다.


스탕달이 파리로 나온 지 불과 1년 후(1800년), 17세 어린 나이에 나폴레옹 군대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참한 것은 이런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친척의 도움을 받아 소위로 임관해 출전했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 북부인 밀라노와 제노아, 볼로냐 등지를 눈여겨 살폈다.

 

그가 이탈리아를 제대로 여행한 것은 30대 나이로 7년 동안 밀라노에 머물 때다. 이 시기는 예술 감상과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회화사’ ‘아르망스’ 등을 집필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곳곳에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를 남달리 사랑했던 괴테와 바이런 못지않게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


스탕달은 고대 유적을 살펴보기 위해 로마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가 가장 좋아한 곳은 중심가 코르소 거리. 로마 심장부인 베네치아 광장에서 북쪽 관문인 포폴로 광장까지 이어지는 거리다. 고풍적이면서도 화려한 건축물이 즐비하고 거리 곳곳에는 판테온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인접 ‘스페인 계단’에 있는 그레코 카페는 그의 단골이었다. 괴테와 바이런도 즐겨 들렀던 곳이다. 스탕달은 이 거리를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찬미했다고 한다. 그는 박물관 관람과 연극 공연을 유달리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분야에선 로마가 천국 아닌가.


스탕달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건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을 통한 행복 추구에 관심이 컸다. 자기 외모에 자신 없어하면서도 끊임없이 여성들에게 접근했다. 특히 밀라노에서 인연을 맺은 두 여성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다.


안젤라의 경우 그에게서 끈질긴 정열을 보게 한다. 스탕달은 1800년 군인으로 밀라노에 처음 갔을 때 상관의 정부인 안젤라를 알았지만 수줍음이 심해 사랑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11년 뒤 그곳에 가서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다른 여성들과 어울려 다녔기 문이다.


스탕달이 정열적으로 연정을 품었던 여성은 마틸드다. 1818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나 두 아이의 엄마였던 마틸드는 좀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오랫동안 수없이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구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작가답게 자신의 연애 실패담을 주제로 책을 썼다. ‘연애론’이 그것이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이 책에 나오는 표현이다. 비록 연애엔 실패했지만 이탈리아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스탕달은 나폴레옹을 좋아한 것 이상으로 이탈리아를 좋아했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수많은 글을 쓴 이유다. 그중에서도 ‘적과 흑’에 비견되는 명작 ‘파르마의 수도원’은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과 향수,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감동을 모두 쏟아부은 작품이다. 파르마는 밀라노와 볼로냐 중간에 있는 작은 도시로, 그가 거의 살다시피 한 곳이다. 


스탕달은 죽어서 파리 몽마르트르에 묻혔다. 그의 묘비엔 이렇게 씌어있다. 


‘밀라노 사람 앙리 벨. 살고 사랑하고 썼노라.’ 


그는 죽어서도 이탈리아 사람인 셈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스탕달> 원윤수,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7

<파르마의 수도원> 스탕달, 원윤수 임미경 옮김, 민음사, 2001

<스탕달 LOVE> 스탕달, 이동진 옮김, 해누리, 2011

 

작가의 이전글 <14> 동방의 우울한 낙타를 동경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