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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Apr 30. 2023

<18> 종횡무진 종군기자로 금세
명성을 쌓다

-윈스턴 처칠의 겁 없는 전쟁터 여행

기마부대 소속 처칠 소위는 휴가가 따로 없었다. 


1년에 2개월 반 정도 주어지는 정기 휴가를 활용해 전 세계 분쟁지역을 쫓아다녔다. 젊은 동료 장교들이 폴로 경기나 연애 사업에 몰두할 때 그는 총탄이 날아드는 전쟁터에 자진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남달랐던 것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을 마치 아름다운 여행지로 생각한 듯하다. 


영국 총리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어린 시절 가문의 수치라 할 정도로 열등생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열정과 용기 덕분에 탄탄대로 인생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귀족 혈통의 할아버지와 고위 정객 아버지의 명성을 물려받은 처칠은 소문난 학습 지진아였다. 해로우 스쿨 재학 때 성적은 전교 꼴찌 수준이었으며, 특히 라틴어와 수학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원 의장을 지낸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길 원했지만 일찌감치 단념하고 학업 성적이 덜 중요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도 처칠에겐 벅찬 관문이었다. 수학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삼수 끝에 겨우 합격했으며, 그나마 보병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기병을 선택해야 했다. 사관학교가 적성에 맞았는지 150명 가운데 8등으로 졸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1세 때인 1895년 제4경기병연대 장교로 임관한 처칠은 전쟁터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매일같이 세계 지도를 펴놓고 모험과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오랜 기간 학교에 갇혀 살다 이제 먼 나라 여행을 계획하며 가슴 설레는 청년에 다름 아니다. 처칠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곳은 대서양 건너 쿠바. 쿠바 반군을 진압하는 스페인군에 합류할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후 5년간 계속되는 그의 화려한 ‘전쟁터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초급 기마장교 한 명이 전력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틈만 나면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하원 의장을 지낸 아버지의 후광 덕분이었다. 런던 사교계를 휘어잡는 어머니의 도움도 컸다. 참전할 마음이 생기면 주저 없이 정계 거물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이런 행태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젊은 장교의 열정과 용기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처칠의 첫 전장 경험. 아버지의 오랜 친구에게 부탁해 스페인 궁정의 도움을 받아 얻어낸 소개장을 들고 수천 킬로미터 여행 끝에 쿠바 현지 총사령관을 찾아갔다. 무척 덥고 습한 정글에서 기약 없이 행군하며 총탄을 주고받은 경험은 처칠 인생에서 무척 값진 것이었다.


이듬해, 1896년엔 부대가 장기 주둔을 위해 인도로 옮겨갔다. 이 무렵 처칠은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글쓰기에도 새삼 불이 붙었다. 인도 국경에서 파슈툰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희망대로 영국 일간지 종군기자로 임명되었다.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로비 덕분이었다.


파슈툰족 진압 전쟁을 경험한 처칠은 곧이어 산악지대에 사는 아프리디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참전했다. 왕복 이동시간을 빼고 단 5일간 전쟁을 경험하기 위해 자원한 것이다. 그의 근면성은 특별했다. 이때의 전쟁 경험을 토대로 부대에서 책을 써 출판하는 열정을 보였다.


아프리카 중북부 수단에도 달려갔다. 나일강과 사막이 펼쳐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병장교로서 돌격 임무를 원 없이 수행했다.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1899년 남아프리카 지역 영국과 트란스발 공화국(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의 나라) 사이에 벌어진 보어 전쟁. 


종군기자로 참전한 처칠은 취재를 위해 탑승한 정찰 열차가 보어군 포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졸지에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고, 지나가던 화물열차에 숨어 구사일생으로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그에게 거액의 체포 현상금이 걸리고, 탄광에서 숨어 지낸 과정 등이 상세히 보도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영국으로 귀국하자 처칠은 가는 곳마다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았다. 각 정당과 도시로부터 순회강연 요청을 받았으며, 급기야 미국에서도 강연할 정도였다. 강연료로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 것은 덤이었다. 막 20세기가 시작된 1900년, 약관 26세에 그는 벌써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그 해 치러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당히 배지를 단 것이다.


 그의 말솜씨는 탁월했다.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유다. 총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면서 역사에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현대 영국인들에게 뉴턴과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위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고, 90세가 넘도록 살았으니 참으로 멋진 인생이다.

그가 성공한 이유,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호기심과 모험심을 앞세운 ‘전쟁터 여행’이 한몫한 것은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으로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전쟁터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참전은 소중한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칠인들 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의 열정과 용기는 특별했다. 10대 시절의 학업 열등감에서 단숨에 벗어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처칠이 한 말이다.

 

참고한 책

<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 윈스턴 처칠, 임종원 옮김, 행북, 2020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 박지향, 아카넷,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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